나는 3남 1녀의 막내로 자라면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는 평범하게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로 했으니 부녀관계는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엄마와는 애착 관계가 잘 되어 있어서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함 그 자체였고 엄마이자 큰 언니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내가 엄마에게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엄마, 엄마는 오래 살아야 해, 엄마는 엄마이면서 내 언니야.”
언니와 여동생이 없는 내가 딱해서 그런지 엄마다.
“그래, 내가 오래 살아야지, 누가 널 챙기겠니.”
지금 우리 집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은 나다. 예전에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큰 아들이었다가 공부보다 일을 선택한 못 배운 둘째 아들이었고 다음으로 고등학교 시절 밖으로 돌며 사고를 치던 막내아들이었다. 그때마다 엄마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자식은 막내 나였다. 그 사랑하던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서울로 직장을 잡고 학교를 다니더니 성직자의 삶을 선택하고 결국 머나먼 아프리카로 가버렸다. 엄마가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달랜 방법은 바로 종교의 힘이 컷을 것이다. 엄마는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매일 마다 딸에 대한 축복과 행복을 빌었을 것이다.
올해 그 딸이 쉰을 갓 넘기고 고향 집을 찾았다. 작년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엄마는 걱정이 되어 하루가 멀게 070 전화로 우리 가족 안부를 물어왔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아들들이 모르는 적금을 깨어 혹시 모르니 코로나 19가 너무 심하게 퍼지면 특별기를 타고 오라고 거금을 보내오셨다. 그 이후 우린 일 년 후이번 여름에 특별기가 아닌 일반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입국했다. 엄마의 소중한 쌈짓돈으로 말이다.
나는 유난히 한국의 여름 날씨를 힘들어한다.
친정 집은 오래된 집이라 천장이 낮고 화장실은 여닫이 거실 문을 열고 나가 신발을 신고 가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다.
엄마의 안마당에서는 '뻥' 뚫린 하늘을 볼 수 있다. 엄마가 돌보는 작은 정원에 활짝 핀 분꽃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창고 처마 밑에 주렁주렁 달린 마늘을 보니 마음이 평온했다.
시댁에서 자가격리 2주를 마치고 봉고차를 빌려 우리 식구 다섯 명과 캐리어를 싣고 친정 집 앞마당에 들어섰다. 이미 부모님과 막내 오빠와 조카가 우리를기다리고 있었다.
사업을 열심히 하는 막내 오빠는 점심밥을 먹기도 전에 아이들 손에 용돈을 쥐어주고 두툼한 봉투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여비에 보태 쓰라고 말이다. 한국에 올 때마다 여비를 챙겨준 오빠다. 그동안 당연히 받았던 용돈이 올해는 유난히 고마웠다. 거기에다 친절한 말투가 가슴 깊이 전해져 왔다. 오빠는 두 번째 집을 방문했을 때에는 온 식구를 위해고급진 소고기 파티까지 열어 주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울컥하니 올라왔다.
‘내 존재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환대를 해 준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지금껏 나는 온 가족을 위해 한턱을 낸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부모님께는 종종 식사를 대접했지만 내 결혼식 때도 내가 모아 놓은 돈이 없어서 세명의 오빠와 부모님이 혼수며 결혼식을 치루 워 주었고 아버지 칠순 때도 미혼이었던 나에게 분담된 돈은 없었다. 가족들은 나를 그냥 막내, 돈 없이 사는 동생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첫째 오빠도 저녁을 먹고 자신의 차를 탄 나에게 계좌 이체로 여비를 챙겨 주었고 둘째 오빠도 새언니를 통해 봉투를 건네주었다. 부모님은 또다시 비행기 값에 보태라고 돈을챙겨주셨으니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내 마음이 변한 것일까?
가족들은 케냐에서 만 14째를 선교사로 살아가는 우리가 고국 고향집을 방문할 때마다 이렇게 여비를 챙겨 주었고 맛있는 음식으로 환대를 베풀었다.
타국에서 사는 것이 힘들었기에 집에 오면 가족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겼는지 모른다. 부모님과 오빠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막내 동생네를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섬겼던 것이다.
가슴이 뭉클뭉클했다. 이것이 가족이구나. 지금껏 나를 위해 응원해 준 가족이라는 큰 힘을 당연히 여겼던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된 것이다. 나는 때론 이런 생각까지 했다. 나는 당신들을 대신해서 아프리카에서 나의 편리한 삶을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가끔 한국에 가면 이렇게 환대받는 것이 어쩜 당연하다고 말이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만한 생각이 아니겠는가. 타인이 나의 삶을 고귀하다고 인정하지 않아도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나를 환대해 준 가족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했다.
그렇게 3년 6개월 만에 찾은 나의 고향집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그 환대의 힘으로 나는 나의 집 케냐로 돌아왔다. 한국처럼 교통이 편리한 곳이 아니고 전기도 수시로 나가는 곳이다. 코로나19로 나이로비에 음식 딜리버리가 활발해졌지만 내가 사는 지역은 음식 딜리버리 제외 지역이다.배달 앱에서 주소가 입력이 안되었다.
케냐에도착 3일 후, 혼자서 배추김치 30kg와 깍두기 10kg를 담그고 이틀 동안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힘에 벅차다는 마음보다는 뿌듯함이 몰려왔다. 아마도 그 에너지는 올여름 한국에서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받은 환대함 때문이다. 환대라는 그 풍성함이 나를 일으켜 세웠기에 그 사랑을 이웃에게로 흘러 흘러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