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90분의 기적

소소한 그림 모임이 남긴 치유의 순간

by 봉순이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업무 프로세스가 익숙해지면서 팀원들의 일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SM(System Management) 팀이었다.

SM이란 고객사에 구축된 시스템(웹, 앱, 인프라 등)을 안정적으로 운영·유지·보수하는 일이다.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게 성과이다 보니 티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배포가 잘못되면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손발이 굳는 긴장감은 여느 프로젝트 못지않다.

배포 후 나의 실수로 PC 레이아웃이 틀어져 나왔을 때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덜덜 떨린 적이 있었다.

“심장이 쫄깃쫄깃하다”는 표현이 귀여울 정도로, 그 순간은 숨이 막혔다. 그럴 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차근차근 체크하는 이사님과 수석님을 보며 ‘강철을 넘어 다이아몬드 심장이다’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림으로 찾은 숨구멍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아이패드를 사면서 시작된 디지털 드로잉.

혼자 하려니 쉽지 않았는데, 연말 회식 자리에서 ‘소모임 이야기’가 나왔고, 용기 내어 이사님께 부탁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림 그리기 소모임을 하고 싶은데...커피 정도는 지원해주실 수 있을까요?”


흔쾌히 “좋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렇게 수요일 점심 ‘똥손탈출’ 모임이 시작됐다.


그림보다 중요한 것들


처음에는 회사 돈으로 예쁜 카페에서 공짜 음료를 마셔보자는 가벼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사심보다는 더 소중한 것들이 남았다.


10명이 넘던 인원은 줄어 4명으로 고정되었고, 날이 좋으면 컵라면과 김밥을 사 들고 야외로 나갔다.

짧은 점심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일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그림을 위한 시간’이었다.

▲ 아이패드로 처음 그렸던 그림

우리는 모두 그림에 초보자였다.

어떤 날은 동그라미만 몇 개 그리고 끝날 때도 있었고,

사람을 그렸더니 이집트 벽화처럼 나와 다 같이 웃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서툰 그림이었지만, 서로의 그림을 보며 응원과 농담이 오갔다.


“책임님, 계속 하면 늘어요!”

“오호~ 구도 좋은데요?”


작은 칭찬은 큰 힘이 되었다.


▲"똥손탈출 모임"의 첫 도전 - 팀코믹스 사생대회에 출품한 우리만의 채소·과일 캐릭터 작품


마음을 나누는 공동체


그러던 어느 날, 한 팀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고민이 있는데요. 들어주실래요?”


우리는 펜을 멈추고 귀를 열었다.

그림으로 연결된 작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무거운 고민을 조금씩 나눠 가졌다.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털어놓고, 듣고, 공감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무렵 나는 남편의 장난스러움에 지쳐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남편의 모습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선임님이 말했다.


“남편분은 남자 형제가 3명이나 되시잖아요. 그래서 더 개구장이로 자라셨을 거예요. 저희 집도 형제가 많아서 장난이 상상을 초월했거든요.”


그 말을 들으니 남편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4형제중에 막내인 남편은 여성스러운 섬세함을 배울 길이 많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편만 보았지, 그가 자라온 환경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때 알았다. 세상은 하나의 시선만으로는 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림 소모임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비춰주는 마음 치료였다.

해결책을 주진 못했지만, 서로에게 숨구멍이 되어 주었다.



다시 모일 그날을 꿈꾸며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똥손탈출 멤버들은 흩어졌다.
하지만 단톡방에서는 여전히 안부를 주고받는다.


“책임님, 그때 진짜 좋았어요. 우리 다시 만나요!”


회사 생활 속 작은 소모임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이런 모임이 가능했던 건 우리의 의지뿐 아니라, 1시간 30분이라는 여유로운 점심시간과 회사의 지원 덕분이었다.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흩어져 있지만, 나는 믿는다. 언젠가 다시 모여 서툰 그림을 그리고, 소박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날이 올 것이라고.

그리고 일터 곳곳에서 소모임들이 은 들꽃처럼 피어 삶의 쉼터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날, 우리의 그림은 빛이 되어 서로의 마음을 다시 반짝이게 만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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