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분산 전략
친절. 친절한 사람.
나는 내가 친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친절하다는 말을 꽤 듣고는 했다.
그래서 친절히 누군가를 대하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말이라도, 같은 행동이라도 상대방을 생각해서 좀 더 친절히 할 수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 한 마디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저런 사람들은 분명 마음에 여유가없는 것일거야, 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바보에요.’라 말하는 사랑에 빠진 눈꼴 시린 커플 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건네는 감사하다는 등의 작은 인사말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게 좋았다.
내가 칭찬을 해주었을 때 상대가 부끄러워하는 게 좋았다.
상대가 궁금해하는 것을 이야기해주었을 때 상대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좋았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을 때 그에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좋았다.
그래, 나는 친절한 내가 좋았다. 웬만하면 이 세상을 둥글게 살아가고 싶었고, 친절과 감사, 희망과 사랑이면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노력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그러면서 나는 정작 나 자신에게 가장 불친절했다. 나 자신을 가장 이해하지 못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내 자신의 생각은 잠시 접어 두어야 했고, 상대방에게 친절하기 위해 나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만났을때 에너지 소모와 에너지 획득의 비율이 9:1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단 한 가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에너지를 획득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누군가가 침범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상태에서 에너지를 충전시켜야만 예민하지 않고 친절한 가면을 쓰고 다른 이를 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 자신과 가깝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들에게부터 친절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게보다 이기적으로 굴었다. ‘이 사람들은 이래도 나를 이해해주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어떤 제안을 거절하고 싶을 때 구구절절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예쁜 말로 포장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적다 보니 ‘솔직하게 나의 입장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나는 ‘친절하지 않았다’와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솔직하다’와 ‘친절하지 않다’는 같지 않다. 솔직하다고 해서 친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솔직하지 않다고 해서 친절한 것이 아니다. 솔직하지 않음으로써 친절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냥 친절하지않는 편이 낫다.
나는 친절하기 위해 솔직하지 않아왔다.
어쩌면 이걸 사회성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누군가의 응답에 거절하고 싶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빙빙 돌려 말하곤했다.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특히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다신 보지 않아도 될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하는 일은 말이다.
누군가에게 나쁜 인상을 일부러 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아가면서까지 다른 이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다. 특히나 내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친절할 필요가 없다. 나 자신, 그리고 나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이 되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기만도 벅차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슴도치 같을까.’라고 생각되었던 불친절하다 느꼈던 사람들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남’들에게만 좋은 사람인 사람을 경계하게 된다. 굳이 힘 빼지 말자. 나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이 에너지를 어떻게 분산하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니까.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모두에게 친절할 필요도, 모두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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