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래된 꿈 (1)

by 레드뷔

겹겹의 만년 설산들 사이 작은 마을에도 새순이 돋았다. 문명의 손길이 닿기조차 힘겨워 보이는 그곳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산 경사를 따라 오밀조밀 자리 잡은 30여 가구에 봄바람이 불자 생기가 서서히 일어났다. 단연 분주한 곳은 처마였다. 겨우내 쌓인 눈 녹은 물이 쉼 없이 떨어지는 동안 아랫집 풍경은 바람을 타고 느긋이 울었다. 새끼염소가 따라 울었다.


오랜 평화가 잔잔히 덮인 마을 어디선가 불쑥 다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아! 그건 그런 용도가 아니다! 게다가 위험하고.”

“아버지, 저는 뜻을 굳혔습니다. 그걸로 전쟁을 끝내고 반드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겁니다.”

“터무니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진정 가능하다고 믿는 게냐? 흥, 중생(衆生)들에겐 어림없지. 평화는 오직...”

“내면의 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요? 그게 당장 안 되는 사람들은요? 수양이고 나발이고 오늘 하루 무사히 넘기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지천이라고요! 지금 당장이라도 멈추지 않으면...”

“아니! 네 생각은 그저 헛된 꿈일 뿐이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당장 눈앞의 사람들이 더 괴롭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런다고 네게 고마워할 것 같으냐? 천만에!”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설마 지금보다 더 비극이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지옥이겠습니까?”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노인은 등을 돌렸지만 그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놈아... 기어코 그렇게 해야겠느냐? 이 애비만 혼자 두고 말이냐?”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들아. 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죄악에서 떠나는 법이 없지.”

“마땅히 쓸 힘이 있음에도 쓰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악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아들 호나야, 제발 가지 말거라.”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노인은 알고 있었다. 평생 자기 뜻을 거스른 적 없는 외동아들이 이번만큼은 그 결심을 꺾지 않으리란 것을.


“아버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호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향해 절을 올렸다. 아버지는 돌이켜 아들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아들 역시 마음이 미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산을 내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노인은 눈물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 탓이다... 네게 그것을 가르치지 말 걸 그랬다... 내가 가르치지 말 걸 그랬다... 아들아... 부디 건강하거라.”



******



“호나, 이거 확실한 건가?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마론이 뻘겋게 달궈진 쇠꼬챙이를 든 채 말했다.


“이렇게 해야 하네. 이게 첫 번째 단계네.”

“......알겠네.”


마론이 무릎 꿇고 있는 호나 곁으로 다가갔다. 그때 호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마론 왕자, 한번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다네.”

“누가 할 소리... 자네... 만에 하나 이게 잘 안된다면... 자네만...”

“이깟 거 아무것도 아니네. 지금 고통받는 이들만 하겠나. 지금은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네.”

“알겠네.”


호나는 나무막대기를 입에 물고는 마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달궈진 쇠꼬챙이를 든 마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앞으로 올 세상만을 떠올렸다. 그리고 ‘전쟁과 고통 없는 세상을 위해...!’를 속으로 외치며 쇠꼬챙이로 호나의 왼쪽 눈을 찔렀다. 호나의 억누른 신음과 지글거리는 소리에 마론 눈가의 얕은 눈물이 격랑했다. 그리고 눈물은 호나의 오른쪽 눈을 마저 찌르고 나서야 평온히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네, 마론.”


호나가 친구를 안심시키려는 듯 먼저 입을 뗐다. 마론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약에 절인 검은 천을 호나의 두 눈에 감았다.


“마시게. 자고 나면 고통이 좀 줄어있을 거네.”


마론은 호나에게 약을 마시운 후 그를 침상에 조심히 눕혔다. 약효가 돌았는지 호나는 크게 하품을 했다. 그 소리에 긴장이 풀렸는지 마론이 호나 곁에 쓰러지다시피 잠들었다.



******



“괜찮은가?” 밤새 곁을 지키던 마론이 막 깨어난 호나에게 물었다.

“조금 쓰라리긴 하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하네.” 호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 꿈을 꿨네. 거대하고 아름다운 흰 나무가 나오는 꿈을.” 마론이 말했다.

“그래!! 드디어 성공했네. 이제, 드디어 완전한 세상이 올 걸세! 완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그래... 드디어... 호나, 진심으로 고맙네.”


마론은 호나에게 연신 절을 했다. 친구의 희생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았고, 드디어 백 년간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사람들도?” 마론이 물었다.

“맞네. 하지만 자네는 더 이상 아니네. 자네에게는 자유를 줬거든.”

“...... 그래서 그랬군... 다행인 건가?”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네.”

“그래. 호나, 자네가 옳겠지. 그나저나 당장이라도 평화로운 세상을 봤으면 좋겠네.”

“이제 곧일세. 이제 곧...”

“그래.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쉬게.”


마론은 호나를 위한 약초를 달이기 시작했다. 나라와 민족의 깊은 갈등이 얽히고 얽혀 이제는 왜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린 그 끔찍한 전쟁의 참상이 끝날 것을 상상하자 마론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마침내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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