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승환은 조금 어정쩡한 시간에 일어났다. 빈속으로 집을 나선 그는 만성 역류성 식도염을 달래기 위해 출근 때만 존재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회사 앞 푸드트럭으로 향했다. 한때 어두운 세계에 몸담았었을 것 같은 험상궂은 아저씨가 그를 맞이했다. 승환이 샌드위치를 다소곳이 주문하자, 아저씨는 주문 번복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듯 지체없이 열판에 마가린을 녹여 식빵 두 쪽을 굽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채 썬 양파, 감자가 들어간 계란 패티도 만들기 시작했다. 현란한 멀티 태스킹과 고소한 냄새에 취한 승환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 셰프는 구운 빵 사이에 계란 패티를 끼워 케첩을 거침없이 뿌린 후, 대각선으로 자른 샌드위치를 포장해 시크한 표정으로 승환에게 건넸다. 하지만 셰프의 도도한 표정이 무색하게 그의 구멍 난 장갑 틈으로 보이는 손가락에는 기름때가 엉겨 있었다. 승환은 잠시 주춤했지만, 셰프의 포스에 압도된 그의 손은 이미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고 있었다. 카드를 본 트럭 셰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현금.”
승환은 허둥지둥 만 원을 꺼내 그에게 상납했다.
“아, 씨... 만 원짜리...”
승환은 쫄아서 “잔돈은 괜찮습니다.”라고 했지만, 셰프는 투덜대면서도 팔천 원을 꼬박 거슬러 줬다.
“우유는? 안 사?”
“아, 네. 제가 우유는 좀... 소화가...”
“목 막힐 텐데... 알았어, 식기 전에 먹어.”
승환은 셰프에게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트럭을 떠났다.
‘이 가격에 맛, 식감, 영양까지. 이게 어디야.’
샌드위치는 거친 듯 친절한 트럭 셰프처럼 뜨뜻했다. 날은 더웠지만, 그는 이상하게 이 뜨뜻함이 싫지 않았다.
승환은 회사 휴게실로 향했다. 자리에서 먹었다가는 분명 식탐 돼지 성 부장이 “한 입만!”을 외치며 절반을 뺏어 먹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여섯 평 정도 되는 회사 휴게실에는 먼저 온 여직원 세 명이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승환과 같은 팀 세경도 그중에 끼어있었다. 진갈색 긴 머리, 큰 눈. 하얀 피부. 그녀는 전반적으로 온순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그녀의 키는 170cm로 만만하게 보고 다가간 사람들을 종종 놀래키곤 했다. 말수가 적고 차분한 그녀는 종종 악바리 기질을 보이곤 했는데, 특히 일 관련해서는 단 한 번도 기한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 밤을 새우든 어떻게 해서든 기한을 맞춰냈다. 다만, 22살. 갓 사회에 나와 아직 내성이 덜 생긴 탓인지 그녀는 성 부장의 조그만 나무람에도 금세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안녕하세요?”
승환이 휴게실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들의 대화가 잠시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안녕하세요.”
승환은 형식적인 인사를 뒤로하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승환의 덩치 탓에 가뜩이나 좁은 휴게실이 더 좁아 보였다. 그녀들은 승환과의 심리적 거리 유지를 위해 그와 반대쪽인 휴게실 문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그리고 승환이 들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얘기라도 나누려는 듯 승환 쪽을 힐끗 보고는 자기들끼리 2초 정도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들은 승환과의 거리, 그리고 승환 귀에 꽂힌 이어폰의 예상 데시벨 값을 보정 후 선형대수와 베르누이 방정식, 그리고 도플러 효과까지 이용해 대화의 볼륨을 순식간에 조절했다. 이 정도면 됐다는 확신이 섰는지 그녀들은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노력은 무의미했다. 휴게실은 귓속말 빼고는 다 들릴 정도로 좁았다. 그럼에도 승환은 그녀들의 노력에 보응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이어폰으로 뭔가 듣는 척하며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뉴스를 훑었다. 정치, 경제 다 시시한 뉴스들뿐이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기사는 어제부터 난리 중인 탑 남배우와 탑 여배우의 열애설 기사였다. 승환은 최근 한창 이슈였던 정치인의 비리를 또 이렇게 덮으려나 싶었다. 그밖에는 인도 북부지방에서 2천여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국가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과학자 놈들. 달은 정복했어도 지구는 아직 덜 정복한 모양이군. 뭐, 덕분에 노돈이랑 대화거리 하나 생겼네.’
승환의 죽마고우 서노돈. 온갖 음모론을 섭렵하고 있던 그는 아폴로 달착륙 조작설은 물론, 랩틸리언이라는 파충류 외계인이 인간 가죽을 뒤집어쓰고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는 친구였다. 심지어 그는 UFO를 보겠다며 신혼여행조차 미국 네바다 51구역으로 다녀온 위인이었다.
‘이번 뉴스도 이미 5초 만에 논문 써놓고 있겠지? 음모론 맹신자 놈... 어휴, 제수씨가 보살이지. 이런 놈이랑 결혼을... 돈이라도 잘 버니 그나마 다행이지.’
해외투자 쪽을 주로 맡고 있던 노돈은 직업적 이점을 백분 활용, 공식, 비공식 정보들과 세계정치, 외교, 자원문제를 버무려 범세계적인 음모를 추론하곤 했다. 꽤나 그럴듯했던 것은 물론, 몇몇은 현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는 그걸로 몇 번이고 큰 수익을 거뒀다. 멘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웬만한 욕이나 정신 공격들은 메이웨더 숄더롤에 튕기는 주먹처럼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승환은 그를 돌아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천재라 불렀다. 어쨌든 그가 비상한 인간임은 틀림없었다.
승환/
[기사 봤냐?]
노돈/
[당연하지]
승환은 무슨 기사인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노돈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승환/
[어떻게 생각하냐?]
노돈/
[당연히 외계 문명이지]
승환/
[ㅋㅋㅋ 미친]
[아니라면?]
노돈/
[유력한 이론이 하나 있는데]
승환/
[뭔데?]
노돈/
[우리나라랑 관련이 있을지도?]
승환/
[너 또 단군 외계인설 얘기하려고 하지?]
노돈/
[아니거든. 좀 더 보고 알려줄게]
승환/
[미친... ㅋㅋㅋ]
[오늘은 39도라더라. 뒤지지 말고]
노돈/
[ㅇㅋ]
“꺄르륵....”
“아 정말? 대애애애박!”
“아 진짜 ‘허준의 첫사랑 대장금’에 김현수 진짜 멋있지 않냐? 이번 주 밀가루 키스 대박!! 세경 씨도 봤어?”
‘뭐? 밀가루 키스? 그놈의 키스들 참 많이도 만들어 낸다. 밀가루 키스라... 줄여서 밀키스인가? 큭큭. 안돼! 웃지마. 이건 아재개그야! 안돼!!!!!!!!!!!!!!’
승환은 아재개그가 떠올랐다는 사실에 이성적으로는 스스로에게 대노했지만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입꼬리는 이미 씰룩대고 있었다.
‘젠장! 젠장! 웃으면 안 되는데... 이미 어쩔 수 없이 아재병 1기가 된 걸까?’
승환은 아재병 말기인 성 부장을 떠올리며 자기도 언젠가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아니요, 하~~암. 못 봤어요. 어제 김해 다녀왔거든요. 심야버스 타고 새벽에 도착해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출근했어요. 저녁에 괜히 커피 마셔서 버스에서도 잠 한숨 못 잤어요...”
세경은 연신 하품을 했다.
“야~ 진짜 피곤하겠다. 엄마는 별일 없으시고?”
“저희 엄마가 가사 도우미 하신다고 했잖아요. 근데 얼마 전부터 무슨 은퇴한 대기업 임원 아저씨네서 일하게 되셨거든요. 근데 그 아저씨 성질이 그렇게 더러운가 봐요. 돈 많이 주니까 좀 더 해보신다고 하는데 워낙 괴팍해서 힘드신가 봐요. 역시 돈이랑 싸가지는 반비롄가?”
“그럼. 내가 예전에 얘기했던 미영이 있잖아. 그 재벌이랑 결혼하겠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플랜 짰다던 애.”
“아~ 그 친구분이요?”
“걔가 결국 준재벌 집으로 시집갔거든, 근데 얼마 전에 동창회에서 걔 만났는데, 친구들한테도 갑질하더라! 어이없게.”
“헐.”
“막 친구들한테 잔심부름시켜. 미쳐가지고.”
“사람들이 돈이 곧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뭐 현실이기도 하지만.”
“내 말이! 요새는 일진도 부잣집 애들이라며? 부모가 문제지. 공부만 잘하면 다 오냐오냐하니까. 잘못하면 혼나는 게 당연한 건데. 우리 어렸을 때는 잘못하면 파리채건 뭐건 엄마 손에 잡히는 대로 그렇게 두드려 맞았는데. 덕분에 그나마 인간처럼 자랐지.”
“맞아요. 저는 효자손 부러질 때까지 맞아봤어요.”
“아 진짜? 세경이 너 같은 순둥이가?”
“네, 저 어렸을 때 말 진짜 안 들었거든요. 적어도 두 개는 분질러 먹었을 걸요?”
“상상이 안 간다 야.”
“우리나라가 너무 급성장해서 아직도 정신적으로나 사회 저변에 깔린 인식들이 저질인 것 같아요.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못 따라가는 거죠....... 하~암.”
“오올~ 고도성장, 물질문명. 야, 세경이 너 좀 멋있다? 이제 머리 좀 식혀라. 뇌가 막 힘든가보다, 하품이나 하고. 나도 어제 늦게 자서 그런가 피곤하네. 하~암.”
“하~암. 언니, 저도요.”
“어? 9시 다 됐다. 빨리 들어가자.”
여직원들이 떠나자 승환은 황급히 휴게실 입구의 정수기로 달려갔다. 그리고 물을 한잔 들이켰다.
‘트럭 셰프 말대로 우유도 살 걸...’
소심했던 그는 휴게실 입구의 그녀들 때문에 감히 정수기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샌드위치 탓에 목말라 죽을 위기에도 그는 그저 침을 모아 죽을 고비만 간신히 모면하고 있었다.
‘것참. 여자 2명까지는 괜찮은데 3명 이상 모여있으면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다니까...’
승환은 물을 한잔 더 들이킨 후, 한잔을 더 채워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책상 파티션 위로 사람들의 머리통이 보였다. 모두 출근해 있었다.
‘캬하! 저 절묘한 파티션 높이! 윗분들께서 우매한 것들 감시하시기 딱 좋은 높이지. 암 그렇고말고.’
승환은 감탄을 연발하며 조용히 자리로 향했다.
“어? 허 대리, 이제 와?”
이 과장의 갈굼인지, 인사인지 모호한 것이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이목이 승환에게 쏠렸다.
‘아, 쉬바, 이 얄미운 여우원숭이 자식! 아직 출근시간 5분 전이잖아! 그리고 나 30분 전에 출근했거든!’
“으흠!” 하며 성 부장이 조간신문을 굳이 소리 내며 넘겼다.
‘하아... 오늘도 대역죄인으로 시작하는구나.’
승환은 조용히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성 부장의 불편한 심기가 그의 등 뒤에 꽂혔다. 한참 동안.
******
점심.
메뉴는 오늘도 청국장이었다. 성 부장의 단골집. 음식이 나오자 성 부장, 윤 차장, 이 과장, 승환은 청국장을 끝장내버리겠다는 듯 말 한마디 없이 청국장을 조져나갔다.
“크흐~ 죽인다. 이 집은 아무리 먹어도 안 질린단 말야. 안 그래, 윤 차장?”
“예 맞습니다. 어젠가 티비에서 이게 항암효과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하더라고요.”
“그치? 보약 따로 있나? 이런 게 보약이야! 이런 거 먹으니까 내가 건강한 거 아냐! 끄~억.”
“트림 소리도 아주 건강하십니다! 하하하.”이 과장이 깨알 같이 거들었다.
‘윽, 더러워. 저 고자 놈들은 속도 없냐? 항암효과라고? 발암효과겠지.’승환이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 점심은 윤 차장이 골라봐 알지? 웰빙푸드로, 그 왜 순댓국 같은 거 있잖아.”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 말입니다, 내일 점심은 순댓국 어떠십니까?” 윤 차장이 바로 답했다.
“아니, 윤 차장! 어떻게 그런 훌륭한 생각을? 안 그래도 요 앞에 순댓국집 하나 새로 생겼더라고! 내일은 거기 가자고!”
“역시 부장님! 거기 요새 핫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거기 젊은 애들한테 인기 장난 아닙니다.” 이 과장이 또 놓칠세라 거짓말까지 해가며 보탰다.
“아, 그래? 하하하, 내가 또 촉이 좋잖아!”
‘어후, 저 모지리 삼 형제들. 아주 끼리끼리 잘 논다. 잘 놀아.’
“허 대리, 표정이 왜 그래? 맛없나?” 성 부장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밤에 잠을 잘 못 잤는지 피곤해서요.”
“아, 그래서 아침에도? 하하하, 허 대리, 적당히 해! 밤에 마누라 좀 그만 괴롭히고. 하하하.”
“부장님, 이해하십시오. 한창때 아닙니까?” 이번에도 이 과장이 놓칠세라 거들었다.
‘아오, 저 촉새 똥오줌 같은 놈들. 성희롱으로 신고할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말마다 저렇게 밉상이지? 『성공하는 진상 짓의 일곱 가지 원칙』 같은 강의라도 듣는 걸까?’
음식점 밖으로 나온 승환 일행을 한여름 극에 달한 더위가 반겼다. 더위에 녹아버렸는지 매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 청국장 냄새...’
승환은 온몸에 밴 청국장 냄새에 몸서리를 쳤다. 그는 탈취제를 뿌려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과거 청국장 냄새 밴 와이셔츠에 탈취제를 뿌렸다가 고블린 소환사의 겨드랑이 냄새 같은 고약한 향기로 업그레이드 되었던 기억이 떠올라 그냥 참기로 했다. 홀애비 냄새도 이긴다는 초강력 탈취제도 청국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항암 효과라더니... 설마, 냄새로 암세포들까지 다 조지는 건가?’
승환은 팀원들과 사무실로 들어섰다. 점심 생각이 없다며 쉬겠다던 세경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하긴, 아직 피로가 안 풀렸겠지.’
“세경 씨. 점심시간 끝났어요.”
승환이 세경을 조용히 불렀다. 반응이 없었다.
“세경 씨?”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승환은 그녀가 알아서 곧 일어나려니 하고 그만뒀다. 성 부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그녀를 괜히 깨웠다가 오히려 자고 있던 그녀가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조용히 자리로 가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
오후 3시 반. 거래처에서 성 부장 손님이 찾아왔다.
“세경 씨! 여기 손님이랑 나랑 커피 두 잔만 줘요. 알지, 내 스타일? 얼음 가득 넣어서 시워~~언하게~.”
“......”
“세경 씨?”
‘뭐야? 아직 자는 거야? 3시 반인데?’
당연히 일어나 있을 거로 생각했던 세경은 아직 자고 있었다.
“세경 씨. 팀장님이 부르시잖아요.”
이민수 과장이 참다못해 일어났다. 그리고 엎드려 있는 세경을 발견했다.
“어? 세경 씨. 어디 아퍼?”
“.......”
“야, 허 대리, 니가 대신 좀 타다 드려.”
“아, 네.”
승환은 성 부장 취향으로 커피 두 잔을 얼른 타서 대접했다. 성 부장은 곰 같은 승환의 커피 대접을 못마땅한 듯 바라봤다. 그사이 이 과장은 세경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뭐야? 기절했나? 숨은 쉬는데? 야, 허 대리 119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네?”
“뭐가 ‘네?’야? 얼른 전화해봐.”
“그냥 자는 것 같은데요?”
승환은 자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 119를 부르라는 오버액션맨 이민수 과장의 지시가 황당했지만, 평소 윗사람들을 향한 그의 과잉 충성 및 과도한 리액션에 익숙했던 터라 그냥 넘기려 했다.
“뭐해? 전화 안 하고?” 승환의 시큰둥한 반응에 이 과장이 정색하며 말했다.
“야, 피곤한가 보지, 그냥 조용히 하고 놔둬. 부장님 손님 와 계시는데 소란 떨지 말고.”
윤 차장이 속삭이며 소란을 잠재웠다. 윤 차장의 말에 이 과장은 즉시 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물론 개인 주식 업무(?)였다. 승환도 하던 업무를 다시 하려 했으나, 그녀가 깼을 때 한바탕 몰아칠 성 부장의 호통이 걱정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손님 앞 성 부장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반쯤 벗어진 머리에서는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
“하~~~암!”
오후 5시. 세경이 잠에서 깼다.
다들 우려의 눈으로 세경을 쳐다봤다. 하지만 세경은 아랑곳 않고 연신 하품을 해댔다.
“세경 씨!! 이리 좀 와봐!!”
그녀의 하품 소리에 결국 성 부장이 폭발했다. 승환의 팀원들은 물론 옆 팀 사람들까지 모두의 관심이 둘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거북이 마냥 모니터 쪽으로 목을 쭉 뺀 채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다만, 눈높이들을 파티션 위 1mm에 맞추고 세경과 성 부장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세경이 성 부장 책상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성 부장의 불호령이 코앞인데도 그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나 긴장감이 없었다.
“세경 씨!! 여기가 호텔이야?! 어?! 여관이냐고!?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성 부장의 호통에 바로 앞자리 윤 차장의 귀가 움찔움찔 댔다.
“아니 그럼 돈을 내고 자던가! 왜 회사에서 월급 받으면서 잠을 자!! 내가 너 때문에 손님들 앞에서 쪽팔려 죽을 뻔했어! 알아?! 밤에 뭐했어? 응? 뭐하고 여기서 처자냐고!! 어휴, 내 입만 아프지. 등신 같은 게. 야! 꼴 보기 싫으니까 저리 가! 안 들려? 저리 가라고!”
성 부장의 호통에도 세경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평소라면 ‘여기가 여관이냐고?’ 정도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을 터인데 오늘은 그냥 멍해 있었다. 잠이 덜 깬 사람처럼.
“가란 얘기 안 들려?”
세경은 목례를 한 번 꾸벅하고 뒤로 돌아 자리로 향했다.
“하~~~~~암.” 자리로 돌아오던 세경이 커다란 하품을 했다.
“......!!!”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잃고 그녀와 성 부장을 번갈아 봤다.
“야!!! 정신 나갔어?! 팀장 앞에서 감히 하품을 해?! 내 말이 지겹냐?! 지겨워??!!”
성 부장은 목까지 빨개져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4층 전체가 웅성댔다.
“부장님, 부장님, 저기 상무님 들으십니다. 담배나 한 대 태우러 가시죠.”
윤 차장이 급히 성 부장을 진정시켰다.
“아니, 저게!!”
“부장님,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가시죠.”
“내가 저거 꼭 자른다. 두고 봐!!”
윤 차장이 이 과장에게 대충 수습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눈치 빠른 이 과장이 윤 차장의 사인을 못 알아먹을 리 없었다. 다만 그는 골치 아픈 수습보다 성 부장에게 붙어 무개념 사원 뒷담으로 점수 따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놓칠세라 성 부장을 쫓아 나갔다.
“저도 같이 가시죠! 부장님, 요새 애들이 말입니다...”
팀에는 승환과 세경만 덩그러니 남았다. 승환이 세경 곁으로 다가갔다.
“세경 씨, 괜찮아요?”
“아, 네....”
승환은 평소와 어딘가 다른 세경을 느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네.”
“그...”
승환은 위로의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세경에게도, 승환에게도 무의미했기에. 승환은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후 이 과장이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 부장과 윤 차장의 가방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승환이 물었다.
“부장님이 차장님이랑 술이나 먹으러 가자고 해서. 허 대리도 일 대충 끝내고 시간 되면 퇴근해.”
퇴근 시간까지는 30분이나 남았지만, 사규보다는 상사에 대한 충성이 우선했기에 그들은 당당히 술집으로 향했다.
‘저 하이에나 이빨에 낀 똥 같은 놈들. 역시 회사는 정치야. 성실한 거 다 소용없어.’
승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 과장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순간 이 과장이 몸을 돌이켜 승환에게 다가왔다.
‘쉬바, 마음의 소리가 들렸나?’ 승환은 움찔했다.
“허 대리, 미안한데 그 내가 하던 기획안 그거 거의 마무리 단계거든? 그것 좀 완성해 놓고 가. 알았지?”
‘이런 똥보다 못한 놈이!’ 승환은 욕이 절로 나왔다. 이 과장이 일주일 전부터 하기 싫다고 제목만 쓴 채 손도 안 대고 있던 기획안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놈의 돈만 아니면...’ 그는 높아지는 혈압과 낮아지는 혈당을 동시에 느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일찍 들어가서 딸내미 보고 싶은데...’
******
밤 10시 반. 승환은 이 과장이 떠민 일을 겨우 마쳤다. 화낼 힘도 없었다.
어디선가 풍뎅이 한 마리가 들어와 승환 주위를 두어 바퀴 돈 후 천장 형광등을 “탁... 탁... 타탁...”하며 머리로 받아댔다.
‘고놈 껍질 참 단단하네. 그래도 계속 저러면 부서질텐데.’
수차례의 박치기 후, 풍뎅이는 결국 형광등 한쪽 가장자리에 안착했다. 승환은 녀석이 가짜 빛, 헛된 것에 미혹된 미련한 놈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여섯 다리를 하늘로, 배를 까발린 채 죽어있을 녀석의 사체를 상상했다.
‘나도 저렇게 대가리 깨져라 헛된 것만 쫓다가 뒈지는 거 아냐?’
허무하고 처량했다. 승환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가 진정 원하는 건, 자신의 꿈은 뭘까 생각했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수업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느닷없이 각자 꿈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다 했다. 한 명씩 그저 자기 꿈이 뭔지 정도만 말하면 된다 했다. 승환과 친구들은 더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 나이었고 - 그래도 그중 하나는 끝까지 산타가 있다고 우기다 때마침 그의 코에 났던 왕 여드름 때문에 아직까지 루돌프라고 불리고 있다 - 어린 시절 호기롭게 내뱉던 꿈들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보다는 영어단어 하나가 더 가치 있다 생각했던 그들에게 선생님의 제안은 당황스럽고 또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예상대로 시커멓고 걸걸한 남고생들의 꿈 얘기는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다. 정의감(?) 가득한 승환과 친구들은 발표하는 친구의 꿈이 무엇이건 일단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때문에 발표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채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승환 역시 파일럿이 꿈이라 했다가 엄청난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 뻘건 얼굴로 자리에 돌아온 승환은 누구보다도 우렁찬 목소리로 다른 친구 놈들의 꿈을 조롱하고 야유했다.
모두의 목이 쉬어갈 무렵 한 친구가 말했다. ‘회사원.’ 그 친구는 꿈이 ‘회사원’이라 했다. 승환은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래도 꿈이라면 그럴싸해야지 하며 적당히 내지른 파일럿. 그건 차라리 없으니만 못한 것이었다. 물론 승환과 친구들은 회사원 그딴 것도 꿈이냐며 야유를 퍼부었고 그 친구 역시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평범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 사실 승환의 꿈도 그런 거였다. 평범한 삶을 꿈이라 말하던 그 친구의 용기가 멋있었다. 나머지 놈들은 노력은 안 하면서 꿈만 거창한 놈들이었다. 회사원... 그 친구의 꿈이 가장 진실했다.
퇴근 준비를 하며 승환은 자기 꿈에 대해 생각했다.
‘난 그냥 아내랑 딸이랑 오순도순 살다가 딸 시집 보내고, 손주들 재롱에 즐거워하다 늙어 죽고 싶은데... 그 정도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