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인도 = 유인도

by 레드뷔

승환은 다시 그 모래섬에 있었다. 이번엔 섬의 중앙이었다. 섬의 중앙에서 본 맹그로브 나무는 더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뒤로는 잿빛 하늘과 붉은 바다가 여전히 보였다. 흰 나무를 중심으로 석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지난 꿈 바닷가에서 회색 조약돌로 보였던 것들은 사람 모양의 석상이었다. 정교한 것은 물론, 크기도 모양도 꼭 사람 같았다. 지나치게 인간과 닮은 석상들을 보며 승환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째 지난번보다 숫자가 많이 늘어난 것 같은데?’


그것들은 모아이 석상처럼 섬 중앙의 나무를 향해 45도 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승환은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근처의 한 석상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가락 사이로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비집고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나 맨발이네.’


승환은 석상을 살폈다. 50대 중 후반의 여자. 155cm 즈음의 키에 이마와 눈가 그리고 목의 주름들. 단정한 옷차림. 풍성한 머리칼과 속눈썹, 오른쪽 눈썹 위의 작은 사마귀.


‘이런 게 왜 여기 있지? 누가 뭣 때문에 이런 석상을 만들었을까? 진짜 리얼하네. ......아니다! 이거... 사람이야! 실제 사람!’


승환은 옆 천막 사람들의 얘기가 떠올랐다. ‘움직일 수도 없고, 나무만 보고 있었다.’승환은 황급히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소름이 그의 팔에서 시작해 등을 스쳐 양 볼을 타고 올라가 머리끝을 한번 찌릿 울렸다. 그는 황급히 자기 몸을 살폈다. 얼마 전 가족 여행에서 그을린 그의 갈색 팔이 눈에 들어왔다. 팔보다 약간 더 짙은 손등, 살짝 핑크빛 도는 손톱과 손톱 위쪽의 하얀 손톱 초승달. 왼손에 끼워진 은빛 결혼반지. 승환은 새삼 자기만 이곳에서 색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환은 모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이번에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고독감에 덜컥 겁이 났다. 승환은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꼬집고 때리고 별짓을 다 해도 꿈에서 깰 수는 없었다. 승환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섬뜩한 기분도 그대로였다. 그는 혹여나 이 꿈을 깰 방법이 있을까 하며 다른 석상들을 더 살펴보기로 했다. 정교한 사람모양의 석상 사이를 걸으며 그는 서 있는 시체들 사이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7번째 석상을 지나던 중 승환의 눈에 낯익은 석상 하나가 들어왔다. 퉁퉁한 5등신 몸에 반쯤 벗겨진 머리,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반팔 와이셔츠와 그 속에 비치는 런닝 셔츠, 배꼽까지 올려 입은 바지, 굵은 검정 뿔테 안경 그리고 그 속으로 보이는 다소 지저분한 피부. 성 부장이었다. 비록 석상 형태였음에도 그의 넘쳐나는 아우라는 감출 수 없었다.


성 부장. 그의 고매하고 모범적인 행동은 흉내만 내도 고속 승진 길이 열리는 한마디로 모든 회사원의 귀감이 아닐 수 없었다. 소리지르기는 기본, 욕하면서 무시하기, 욕하면서 책임 떠넘기기, 욕하면서 성과 가로채기, 욕하면서 심부름 시키기, 그냥 욕하기 등등 정말 악마와 불알친구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할 정도로 사악한 인간이었다. 그 위인께서 지금 승환 앞에 넋이 나간 채로 서 있었다. 승환의 마음속에 그간 시달렸던 일들이 떠오르며 마그마 같은 분노가 끓어 올랐다.

‘이 똥돼지 자식. 귀싸대기를 때려볼까? 아니면 인중에다 펀치를? 아, 둘 다 하면 되겠구나.’

승환은 마그마 같은 분노를 내뿜으며 석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막상 섬뜩한 석상에 손을 대려니 거부감이 들었다.


‘좀 꺼림칙한데. 먼저 발로 슬쩍 건드려 볼까?’


승환이 발을 내려다보니 그의 발에는 어느샌가 신발이 있었다.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더니 신발이 생겨난 건가? 역시 꿈이란 건 신기하군.’


승환은 신발 신은 발로 성 부장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가 건드린 정강이 부분이 마치 종이 위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회색에서 실제 색으로 번져갔다. 색은 30~40cm 정도까지 퍼져나가더니 다시 서서히 회색으로 돌아왔다. 승환은 놀람 반 두려움 반으로 석상을 다시 두어 번 건드렸다. 세게 건드릴수록 실제 색으로 퍼지는 면적이 넓어졌다.


‘!!!’


승환에게 복수심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이 섬뜩한 곳과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성 부장님!”


승환은 성 부장의 두 어깨를 힘껏 흔들었다. 승환의 손이 닿은 두 어깨에서부터 본래의 색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승환은 성 부장이 다시 회색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그를 힘차게 흔들었다. 어깨에서 목으로, 머리로, 허리로, 다리로, 발끝까지... 드디어 성 부장이 온전한 사람의 색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제 색깔을 되찾은 성 부장은 더 이상 회색으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흰 나무를 보고 있었다.


“부장님, 부장님!!” 승환이 외쳤다.


그 순간 성 부장 발밑의 모래가 갑자기 위아래로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승환은 놀라 후다닥 뒷걸음질 쳤다. 모래는 커다란 뱀처럼 꿈틀댔다. 그리고 모래의 움직임이 잠잠해졌을 때 성 부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발끝부터 사라진다던가, 희미해지다가 사라진다던가 그런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


그냥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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