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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긋따 May 16. 2024

무지성의 갓생은 골로 갑니다.-①

갓생 부작용 리얼 후기.

더 이상 직장이 나를 상징하는 이름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로 최선을 다해 회사 밖에서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하여 자기 계발에 미친 듯이 몰입하였다. 물론 새 부서에서의 업무를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평일엔 밤 9시까지 야근을 해가며 해야 할 일들을 충실히 처리하였다. 그리고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지기 직전의 몰골로 돌아와 늦어도 11시가 되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4시 반에 기상하는 루틴을 반복하였다. 모든 일들에 우선순위를 정하여 하루 24시간을 나의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시간으로 조금이라도 더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자기 계발서와 동기부여를 자극하는 유튜브 채널, 인스타 인플루언서들의 영상을 미친 듯이 찾아보면서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비관하기보다, 각성하게 된 좋은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최대한 긍정적인 희망회로를 무한히 돌리고 또 돌렸다.


그렇게 '갓생 살기 프로젝트'가 급행열차를 타고 분주히 달려갈 때 즈음, 내 몸에서 이상신호를 느끼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하루종일 집중이 되지 않고, 간단한 문장도 읽어 내려가기가 어려웠다. 방금 읽고 나서도,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단순한 내용을 수십 번 반복하여 읽었다. 피곤한 탓인가 싶어 수면시간을 늘리고, 하고 있던 자기 계발 활동도 줄이며 휴식을 취했지만, 이상 증세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단기적으로 기억을 깜빡하는 건망증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복합적인 현상과 함께 점점 심해지는 무기력감은 서서히 나의 일상을  잠식해 나갔다. 얼마 뒤 이러한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의사는 다소 냉담한 표정으로 담담히 알려주었다. 평소 회사에서 우울증을 핑계로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며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빌런 직원들을 종종 봐왔지만, 내가 진짜 우울증에 걸릴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보통 우울증 환자라고 하면 늘 슬프고 우울해하고,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런 모습일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하다'는 직접적인 언어 대신 '무기력하다'는 감정을 훨씬 더 자주 표현한다고 한다.

잠시라도 휴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부모님이었다. 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큰 딸로만 알고 계시는 분들께 어떤 말로 입을 떼야할지 도저히 엄두가 안나 사무실 천장을 멍하니 보며 눈물로 일렁거리는 눈가를 자주 훔치곤 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나에게 요즘 무슨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직접 내가 스스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먼저 짐작하고 조용히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 여태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 큰 딸도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해 '

유난히도 추웠던 새벽 출근길에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조용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만하면 지칠 때도 되었으니, 회사 휴직 처리되면 푹 쉴 수 있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연신 당부를 하셨다고...

어머니는 내가 어느 정도 회복을 하였을 때 즈음, 아버지의 마음을 나지막이 전하셨다. 그 말을 듣고 몇 초가 흘렀을까. 원인을 알 수 없는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면서 이렇게 오래도록 서럽게 울어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 항상 맡은 역할을 충실히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하지만, 7년 동안 그에 합당한 기회가 왜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건지, 무능하게만 느껴지는 나 자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 말 한마디가 그동안 다른 동료들과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해 가며 열패감과 자격지심으로 속상해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의미를 '열심히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인정'으로 다시 정의 내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나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던 아픔에 대하여 처음으로 공감받는 기분이 들었다.

@geut__ta 직장공감툰·일러스트

그렇게 나의 인생에는 없을 것 같았던 '우울증으로 인한 휴직'이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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