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살이 팁 5 - 즐기는 자가 주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이다. 계절이 쉼 없이 돌다 보니 어느덧 마을 대동계의 중견 계원이 되어간다.
가진 것 없어도 떳떳하고 있어도 무심해지는 기분이다. 누군가의 드러낸 자랑마저 미소로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 주는 아량에 더해 부러워할 이유가 없어도 부러운 감탄사를 선물로 나눈다.
뭐든지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면 여유가 생기듯 마음도 그렇다. 마음 걸음을 늦추면 뉴스를 통해 보고 듣는 어지러운 것들을 보고 듣는 눈과 귀도 관조하는 모드로 순화된다. 관조하려는 마음과 오감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날카로운 신경 간의 괴리는 여전하다. 그래서 반응을 늦추고 행동이 닿지 않게 마음을 구름 위로 높이 올려놓는다.
어려운 정치 하려 애쓰던 어린 사람들이, 세금 쓰는 권력, 사람 겁주는 권력을 쥔 녀석들이 되어가고, 고위 관료들이 나라를 위해, 명분을 위해, 자기편을 위해,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애써서 지지고 볶으면서 공직을 타락시키는 모습이 훤히 다 보인다. 이 모든 허상을 구름 위에 앉아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리라.
2,30대 청년의 미래를 60넘은 이들이 좌지우지하려는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면서도 어느덧 너 자신이라도 발언권 행사 욕구는 참으라고 스스로에 주의를 준다. 국법으로 주어지는 투표권 만으로도 권리행사는 충분하다 생각한 지 오래다. 주책없이 엉뚱한 깃발 들고 나서는 70대를 보고는 ‘아직 철 안 든 한심한 놈들’ 하다 보니 어느덧 마음은 군자의 경지에 있다.
구름 위에 마음 얹어 놓고 외적이 침입할 때만 마치 내일(來日)이 없는 듯 용맹하게 나설 일이다. 나이 들었어도 마음 팔팔한 노인이 젊은이를 위해 사선(死線)에 서서 항쟁에 나서는 나라를 누가 감히 넘볼 수 있겠는가. 구름 위 경로석에 이런 마음이 가득 얹어 있어 든든하긴 한데 그 수가 너무 많기도 하다.
세상이 어지러워 보이고 부침(浮沈)이 반복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쉼 없이 발전해 왔다.
하늘의 움직임이 건강하니 군자는 쉬지 말고 노력하라. - 천행건 군자이 자강부식(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 - 주역 건괘의 문구다.
사십 대에 접어들 무렵이던 젊은 시절, 주역을 읽다 꽂힌 이 문구는 어지러운 광경을 보고 막막한 심정이 될 때마다 등대의 불빛과 같았고 눈앞의 자연이 평온해 보일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따올리는 금언(金言)이다. 새삼 전원생활과 함께 벽에 붙여놓고 되새길 문장이다.
서양에서도 누군가가(마르틴 루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비슷한 말을 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동일한 문장의 금언을 읽어도 마음에 새기는 이들 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데 나는 이 문장을 접할 때면 배의 평형과 중심을 잡아주는 바닥짐(ballast)을 떠올린다.
종말처럼 덮쳐오는 풍랑 속에서 배가 흔들리고 휩쓸릴 때 중심을 잡고 배를 안정시키려면 바닥짐 혹은 평형수가 필요하다. 구름 위의 신선인양 지내다가도 구름아래 세상에 풍랑이 거셀 때 사회의 바닥짐으로 기꺼이 내려와야 한다. 어눌하고 굼떠진 몸이지만 마음이 무거워졌다면 바닥짐으로는 제격이 아니겠는가.
전원생활하겠다고 구름 위에 떠 있다 보니 내일이 없어도 섭섭하지 않을 만한 내공이 쌓인 것 같다면 분명 자아도취(自我陶醉) 상태로 들어선 것이리라.
얼마 남지 않았겠지만 언제 일지 모르니 많이 남은 듯 호흡 길게 살 일이다. 남은 날에 듣기 좋고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내게는 ‘즐기는 자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즐겁게 보고 들은 이가 그 꽃의 주인이고 그 새의 주인이다.
쓰죽천국 - ‘쓰고 죽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는 신조어다. 함께 걷기 좋아하는 친구들 다섯이 한잔할 때 건배하는 조어이니 아직 널리 퍼진 말은 아니지만 그 뜻은 참으로 깊다. 마구잡이로 돈을 쓰며 사치와 낭비를 하자는 것으로 들린다면 대화가 필요해 보인다. 수중에 쓸 돈 한 푼 없다면 쓰고 죽는 필요조건은 갖춘 것 같지만 (쓰고 싶은 것은) 쓰고 죽어야 하는 충분조건은 못된다. (우리말 참 심오하다.) 이 상태면 아무래도 사회의 도움을 받든 지 더욱 분발해야 천국 갈 것 같다.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면서 억만금을 쌓아 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끼고 남겨놓는 행동은 내일에 희망을 걸면서도 미래를 불안해하는 약한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긴 하다. 우리 영토 안의 누구도 먹고사는데 걱정이 없다는 믿음을 국가가 보장해 준다면 사회생활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한다. 사회안전망이 전혀 없다시피 살벌하게 각자도생 해야 하는 곳에서 일하면서 느낀 바 있어 나는 뉴 밀레니엄이 시작될 때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과 확대를 지지하고 기대했다. 자본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자이자 사회안정주의자이니 어쩔 수 없이 나 는 보수성향일 수밖에 없다. 그 연장선에서 기본소득제도를 바란다 하여 혹시라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연상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자들과 중산층이 열심히 일하고 키운 당대의 재력을 어떻게 남기고 갈까 하는 고민보다 살아생전에 어떻게 잘 쓰고 갈까를 고민하는 사회가 건강하다. 기업의 발전에 투자하는 만큼 후손을 위한 무형의 가치에도 투자하고 좋은 일에 능력에 맞게 기부도 하면서 무엇보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남김없이 쓴다면 사회의 활력도 공동체의 일체감도 커질 것이다. 쓰죽천국은 부자가 돈 쓰는 것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제도적으로 끼니걱정, 잠잘 곳 걱정하는 이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표어이다. 그러다 보면 쓰고 죽는 현세 자체도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구나 한번 사는 인생이다. 쓰죽천국-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면서 사회의 주인이 되자는 운동의 자본주의적 슬로건도 되겠다.
꽃도 새도 돈도 다 즐기는 자가 주인이다. 세상사에 관심을 줄이고 손 닿고 눈 닿는 것에 즐거워 하자 다짐한다. 구름 옆으로 드론을 탄 신선이 휙 지나가며 엄지 척해준다. 자아도취 속 착각(錯覺)이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