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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29화

시간의 주인 되기

전원살이 팁 6 - 형편에 맞게 물 흐르듯

by 시준

석양의 햇살 속에 떠있는 솜털이 천천히 그리고 유유히 내려앉는 것을 보며 영화 속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있는 포레스트의 머리 위로 깃털이 미풍을 타고 허공에 머물던 장면을 떠올린다. 나의 인생 영화인 포레스트 검프의 그 깃털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시간, 운명, 선택, 그리고 삶의 흐름에 대한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나는 바람에 흘러가는 깃털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존재일까?’ 묻는다.

깃털이 바람에 따라 허공 속에 움직이듯, 시간도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이는 시간이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결국 인생 전체로는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세어보니 이 영화를 다섯 번은 본 것 같다. 볼수록 영화의 메시지를 내식으로 해석하고 공감하면서도, 문득 한번 사는 세상에서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 어느 시점부터는 가능해야 제대로 사는 것 아닌가 하는 강렬한 의욕을 느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득도했다고 소문날까 두렵다.


출근의 의무나 퇴근의 재미를 잊어야 하기에 요일의 구분도 점차 희미해지고, 하루의 가치는 통일되고 평준화되어 갈 때였다. 매일이 일요일 일 수도, 매일이 월요일 일 수도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수익을 얻기 위해 벌인 프로젝트는 대체로 시간의 감옥에서 온 힘을 쏟아 완료하는 결과 중심적인 일이다. 직장 생활 내내 갇혀 있던 시간의 감옥에서 풀려나자 몸은 자유인이 되었는데 마음은 여전히 갇혀 있었다. 그러기에 다시 또 시간의 굴레를 쓸 수는 없다는 자유의지를 다짐하곤 했지만 나 스스로 시간의 주인이 될 생각을 못했다.

결과 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그 결과를 평가받아야 하는 직장에서 물러나서도 매사에 계속 결과 중심적인 사고를 하면서 생을 마감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닌 스스로의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다. 살면서 결과 중심적인 사고를 해야 할 인생의 어느 정점 기간에는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이후에는 점차 과정을 즐기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어른스럽다고 본다. 허공에 떠서 바람결에 날리는 포레스트의 깃털은 결과 대신 움직이는 과정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영화 속 포레스트의 성취 하나하나는 그 결과를 생각하고 이룬 것이 아니다. 바람결이 그렇게 이끈 것이다


시간의 그물에서 나와 시간의 주인이 된 기분으로 이제는 바람결과 같은 시간에 맡기고 싶다. 그래서 ‘무엇을 언제까지 한다’는 목표 다짐이나 계획 대신 ‘매일 세 시간을 바깥에서 놀면서 일한다’는 활동 지침만 지키려고 한다. 눈, 비 오는 날은 자연이 주는 감사한 여분의 휴가로 즐긴다.

밖에서 노닥거리다 세 시간이 되면 들고 있던 호미든 삽이든 그대로 두고 들어와 씻는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어디다 팽개쳤는지 호미가 자꾸 없어진다. 전원생활을 즐기려면 이 원칙 은근히 중요하다.


시간의 제약을 벗으니 시간을 내 맘대로 토막을 내어 ‘시간 꾸러미’를 즐길 수 있는 단계로 진화한다. 예를 들면,

‘이번 계절에는 시간 꾸러미를 좀 더 큰 토막으로 잘라야겠다. 서울의 이틀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시골의 하루랑 바꾸는 셈이지. 하루가 48시간이나 되니 뭐든 원 없이 해도 돼. 하루에 한 번 먹으라고 했으니까, 먹는 약도 48시간에 한번 먹어도 되고.’ - 이런 식으로 스스로 설정하면 된다.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적은 걸 보면 슬며시 미소 짓게 되겠지만, 젊었던 날 심취했던 단전호흡의 이론과 뿌리가 닿아있다. 십 초에 한번 하던 호흡을 이십 초에 한번 하면 하루를 두배로 늘려 산 기분이었다.

시간 꾸러미를 맘먹은 대로 토막을 내다보니 실제로 젊은 의사 선생께 혼나기도 했다. 삼 개월마다 타가야 하는 약을 5개월 만에 불려 가 아직 남아있다고 했더니 빤히 쳐다보며 혼 내주신다. ‘그러다 큰일 납니다.’

걱정해 주는 이들이 고마워서 내 시간 꾸러미가 신체 리듬과 맞을 때까지는 양보하기로 했지만 큰 틀에서 주관적으로 시간 꾸러미를 토막 내는 재미와 지혜는 여전하다.

재미난 올림픽과 월드컵을 왜 4년마다 할까? 형편에 맞게 4년의 시간 꾸러미로 토막을 낸 셈이다. 매년 하기 버거우면 이년이나 삼 년마다 하면 된다. 농사도 그렇고 기념일도 각종의 모임도 다 마찬가지다. 시간의 주인이 되면 바쁠 것도 게으를 것도 없다. 형편에 맞지 않게 무리하면 시간의 노예가 되어 기리는 마음이 지치고 끝내 그 대상인 기념일도 모임도 형해화(形骸化)되기 쉽다. 반대로 형편에 맞고 재밌으면 하루에 한 번 하던 것을 두 번한들 무엇이 문제가 되랴. 하고 싶은 일이면 잠도 자지 않고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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