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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Feb 29. 2024

찰나에 들어선 감정

익숙한 행동들에서 묘하게 피어오르는 의문점들. 시작이었다.


남들에게 베푸는 호의와 배려에 구분은 없었다. 친함의 정도에 따라 방식이 사뭇 다를 수는 있어도 분명 똑같은 것에 똑같은 선에서 대했다. 


여자는 여자니까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이 존재했고 남자는 남자니까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존재했다. 이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성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냥 그랬다. 남자애들한테 하는 배려보다는 여자애들한테 하는 게 더 친절하고 살가웠다. 아무런 마음 없이 그냥 그래야 될 거 같았다.


너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해주는 수저 놓기, 물 따라주기, 문 잡아주기 같은 뻔한 매너와 배려가 있을 뿐이었고 정말 이성으로 느껴져서 하는 사심 담긴 행동을 옮긴 적은 없다.


술을 먹다 늦은 밤에 집에 데려다 주는 것도 너뿐만 아니라 다른 여사친들에게도 그래왔다. 뭔가를 흘리면 냅킨을 가져다주는 것도, 무거운 게 있으면 대신 들어주는 것도 너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래왔다.


다들 고마움을 느끼기도 하고 편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니 서로 간에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사소한 배려들은 관계에 더욱 도움을 주었다.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상담을 하면 같이 욕을 하고 슬퍼해줬고 좋은 일이 생겨 자랑하면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 줬다.


그러다 네가 남자친구가 바람을 펴서 헤어진 후에 울면서 나에게 상담 아닌 위로를 받고 있던 때부터였을까.


다른 친구들의 고민을 들을 때도 지금의 너는 괜찮을지 걱정됐고 다른 친구들의 성공을 들을 때도 너는 준비하던 것을 잘 해냈을지 궁금했다.


평소처럼 친구들을 집에 데려다줄 때에도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염려했었고 다른 여사친들에게 하는 배려에 조금씩 어색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냥 너랑 있는 게 제일 편한 것 같다. 내가 하는 배려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떠오르니까. 나는 너를 챙겨줘야 하는 사람이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다. 나에게 챙김을 받고 편안해하고 행복해하며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너를 볼 때면 내가 기쁘다. 나를 위한 배려인 것이다.


솔직히 네가 울 때 꽉 진 주먹 탓에 미처 자르지 못한 손톱에 살이 조금 파였을 정도였다. 미치도록 화가 났다. 고작 그런 놈 때문에 우는 네가 밉고 이렇게 슬프게 한 놈이 짜증 나서.


'나라면 안 그럴 텐데'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에 아마 무의식적으로 인정한 것 같다. '나는 얘를 좋아한다.'라고.


점점 숨기기 어려워졌다. 주변에서는 평소의 나와 똑같은 모습인 덕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점점 몇몇이 다른 친구들을 챙길 때와는 조금 다르지 않냐며 둘 사이에 뭐가 있냐는 질문을 던져왔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의 나라고 둘러대지만 나도 안다. 누가 봐도 남들과는 다르게 대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숨겨야 했다.


지금의 네가 내가 가진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함께 지내오는 시간 동안 쌓아온 친구로서의 이미지와 추억들은 너무 깊게 박혀서 다른 모습을 생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두려움을 심었다. 더 이상 네 곁에 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두려웠다. 연인이 되어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만일 잘못되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불안하게 만들었다.


곁에서 조금씩 지나온 아픔을 씻고 자신만의 밝음을 다시 찾아가는 너를 보며 다짐했다. 고백해야겠다고. 아직도 두렵다. 혹시나 곁에 있지 못할까 불안하다.


그래도 또다시 다른 남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너랑 있을 때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 너 또한 그렇다면 이 마음에 대한 답이 통할 것이라 믿는다.


내일에 나는 그리고 너는 행복한 사람일까 슬픈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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