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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곧 자본

by 정다훈

예술은 더 이상 배고픈 자들의 지식양분이 아니다. 배부른 자들의 여유에서 새어 나오는 것에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예술은 배고픈 것, 헝그리정신으로 자신만의 것을 개척하여 내비치는 것을 예술이라 불렀었다. 남들의 이해나 공식에 따른 것이 아닌 순수한 표현에서 새어 나오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이런 예술은 이제 찾기 어렵다.


오랜 시간 동안 글, 그림, 조각, 음악 등 수많은 예술분야에서 엄청난 양의 작품이 쏟아졌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책은 더 이상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써서 내는 작품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럽기까지 하다. 누구나 쉽게 책을 낼 수 있게 된 지금, 단순히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책이 한 권 있다고 해서 스스로 작가라 칭하기에 부족하다. 더군다나 현대에 가장 중요한 자본, 이게 없는 예술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돈을 바라보고 만드는 상업성 짙은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없으면 작품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은 이제 정말 옛말이 되어버렸다. 정형화된 시스템과 큰 성을 만들어낸 기존 자본가들의 입김은 거세다. 제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도 당장 자본의 선택을 받아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 이상 한 사람의 망상에 불과하다고 치부된다. 또한 삶은 그런 예술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당장에 배가 고프면 막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 자신의 삶을 끌어가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 알아주겠지 하면서 굶주린 배를 잡고 예술활동만을 하는 것은 그저 사회에 도태된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현실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어 그 외의 시간에 노력을 하는 이들은 뭐가 되느냐. 지극히 소수의 사람, 결국은 그런 삶을 성공으로 바꾸어낸 사람만이 예술을 했다고 불리는 것이다. 이전부터 말했지만 예술은 결국 선택(자본) 받은 자들이 말하는 것. 어떤 미술 작품 하나를 내어놓았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것 보다도 이미 예술가로 불리는 한 전문가의 말 한마디가 더 큰 영향을 끼칠 터,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결국 모든 예술에 붙은 것은 상업성. 그렇기에 예술은 더 이상 배고픈 자들의 지식양분이 아닌 것이다. 장대한 꿈을 가졌다 할지라도 배고픈 현실 앞에서 먼저 만들어내야 할 것은 짙은 상업성을 띈 작품이다. 배부른 다음에야 자신의 속 이야기,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예술을 할 수 있다. 그때에 되어서 하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다. 왜? 만들어진 자본이 자신의 예술을 현실로 바꿔주니까.


요즘 들어서 자본(돈)에 관련된 얘기를 너무 많이 적어서 조금 줄이고 다른 얘기를 적고 싶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걸 빼면 진행할 수 있는 얘기가 거의 없다 싶을 정도다. 아마 나는 돈을 증오하다 못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가치에 집중하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대세에 편승하여 스스로의 작품을 돈으로 바꾸는 상태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서 자주 하는 것은 잠깐의 명상 이후에 글로 쓸 주제를 정하는 행위. 주제는 또 두 가지로 나뉜다. 소설에 관련된 것과 내면의 이야기를 적어내는 것. 이 두 가지를 명확히 분리해서 적는 것은 내 마음 정리에 꽤나 도움이 됐다. 내 스스로의 작품활동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나누어 놓으니 해야 할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해졌다. 이것의 문제는 딱 하나, 해야 하는 것이 다른 일과 겹쳐 버리면 개중 하나를 포기하게 되는 것. 소설 한 편을 내보고 싶어서 적어보다가 지금 당장 어학점수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면서 거의 내려놓고 있다. 이래서는 이전에 포기해 버린 수많은 도전들 중에 하나가 되어버릴 까봐 두렵다.


어떻게든 사회에서 단 하나라도 인정받을 만한, 자본이 생길만한 글이 하나 생겨줬으면 좋겠다. 그때에 가서 적어내는 내 이야기들은 예술로 불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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