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선물입니다
교사의 말은 무게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씁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에게 책 좀 많이 읽으라고 꼭 말씀해 주세요.”
학부모 상담 시간에 종종 듣는 말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런 부탁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었습니다.
‘그건 가정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요?’
그런데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제 생각은 말끔히 바뀌었습니다.
“아빠, 밥 먹고 나면 꼭 양치해야 해. 안 그러면 세균이 우리를 공격한대.”
식사 후 양치를 재촉하는 아이의 말에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수없이 이야기했을 때는 흘려듣던 말인데, 유치원 선생님의 한마디 덕분에 그것이 규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교사의 말은 다르구나.’
같은 말도 교사가 하면 훨씬 더 깊고 무겁게 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더욱 신중해지려 애썼습니다.
저는 말을 잘하고 싶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을, 꼭 필요한 순간에 잘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말에 재능이 있는 교사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하지 못한 말을 밤늦게 떠올리며 아쉬워한 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말은 흘러가지만 글은 남습니다. 그날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글로 남기면, 누군가에게는 늦게 도착한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뜻밖의 배움이 됩니다. 교사의 말이 글이 되는 순간, 그 말은 나를 넘어 다른 교사에게, 미래의 나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집니다.
아이들과의 시간, 글로 남겨 오래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교사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으신가요?”
얼마 전, 예비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마친 뒤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질문을 듣는 순간,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북한에서 탈북해 한국에 온 아이였습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지내는 모습이 참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두 달쯤 지났을 무렵부터 아이는 자주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진료까지 받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몸이 아프다고 호소하길래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아이가 한국에 오기까지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 속에 감춰진 ‘괜찮지 않은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 아이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아이였습니다. 괜찮은 척 씩씩하게 지내려 애썼지만, 깊은 상처는 마음을 병들게 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다음 해 스승의 날, 그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선생님은 진짜 선생님이었어요.”
문법에도 맞지 않는 그 말 한마디에, 저는 울컥했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해 25명 남짓한 아이들과 한 해를 살아갑니다. 함께 웃고, 울고, 감동하고, 때론 아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소중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집니다. 그중 유독 또렷하게 남아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글로 남긴 아이들입니다.
순간의 감동이나 눈물도 글로 남기면 오래도록 저와 함께합니다. 제가 쓴 글과 책 속에서 그 아이들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교사로서의 철학과 신념이 담긴 또 하나의 수업입니다. 교사의 글은 교사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는 아이들과 함께한 삶이 녹아 있습니다.
글쓰기는 교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제 글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지 기억을 남기기 위해 썼지만, 나중에 같은 고민을 하는 선생님들이 제 글을 읽고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저만 힘든 줄 알았는데, 선생님 글을 보니 힘이 났어요.”
이런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제가 겪은 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다시 걸어갈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집니다.
글은 교사의 경험을 넘어서 또 다른 교사에게 건네는 조언이 되고, 공감이 되고, 응원이 됩니다. 때로는 글 한 줄이 지쳐 있는 누군가를 다시 교단에 서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1년 동안 부장교사로 애쓴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관리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 너 싫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기대했던 저에게, 난데없는 그 말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한 달 가까이 저는 골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도, 일도 피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따뜻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공감과 위로가 저를 다시 숨 쉬게 해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김태현 선생님의 《교사, 삶에서 나를 만나다》가 제게 건넨 문장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무기력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이끌려 자신의 삶에 대한 미래를 잃어버린 것이다.
…심한 무기력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은 내 삶에 오히려 큰 뿌리를 만들고, 새로 일어설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p.125)
그래서 저는 지금도 글을 씁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그것이 제 안에만 머물지 않도록 그때그때 메모합니다. 말로 전하지 못한 마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교육의 의미를 글로 남기려 애씁니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가 비슷한 어려움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오늘 선생님이 교실에서 만난 특별한 순간을 떠올려 보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야기를 글로 남겨 보세요. 언젠가 그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도착할지 모릅니다. 선생님의 말이 글이 될 때, 그 말은 더 깊어지고, 더 멀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