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낙서인 Oct 13. 2022

뉴욕 정상에서 JayZ 듣기

기대했던 것과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



(1)

쓸데없는 완벽을 추구하곤 했다. 특히 분위기에 있어 그런 편이다. 산책하는 저녁엔 선선한 바람이 불어야 하고, 퇴근 후 사온 맥주는 상쾌하게 샤워를 마쳤을 때 마셔야 한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마신다면 안주는 술과 꼭 맞아야 한다. 한강의 야경을 볼 때나 운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순간이 나름대로 정해놓은 분위기에 맞는 상태이길 바라는 편이었다. 누군가는 너무 감상적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럴 때 만족과 즐거움을 느꼈다. 때로는 감동도 받았고.


분위기 얘기를 더 해보자면 이때 중요한 건 '음악'이다.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 상황에 맞는 음악은 빠져선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가서도 함께 들을 노래들을 미리 생각해뒀었다. LA에선 Dr.Dre와 Snoop Dogg을, 뉴욕에선 JayZ와 Nas를 들어야 했다. 왜 힙합이었냐면 내가 힙합을 좋아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당시엔 미국하면 힙합이란 생각이 강했다.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선 나온 생각들이라 빈틈이 많지만 그땐 마냥 그랬다. Frank Sinatra의 New York, New York이란 유명한 곡도 있었지만 당시 내 감성은 JayZ의 Empire State of Mind였다. 도입부 비트부터 설레는 그 곡. JayZ의 묵직한 랩과 Alicia keys의 시원한 목소리가 뉴욕의 화려함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좀 있지만, 어떤 노래가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냐 묻는다면 단연 이 노래다.

덕분에 나는 미국 여행을 계획하며 이 노래를 뉴욕에서 꼭 듣겠다고 다짐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노래의 제목에 맞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정상에서 듣고 싶었다. 그건 마치 뉴욕의 정상, 세계의 정상(?)과 같은 느낌일 거라고, 그 위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뉴욕을 외친다면, 정말 잊지 못할 감동일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느꼈던 뉴욕에 대한 환상을 딱 충족시킬 장면이라 상상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뉴욕은 상상과 조금 달랐다. 뭘 감상할 시간도 없이 붐비는 사람들과 소음 때문에 정신없던 첫인상이 기억난다. 지하철은 낡았고 도로는 건설 중인 곳도 많았다. 덕분에 공사장 소음과 자동차 경적 소리가 과할 정도로 반짝이는 머리 위 전광판 위로 붐비는 기분이었다. 한 손에 끌려가는 캐리어는 공사로 울퉁불퉁한 도로 탓에 덜덜거리고 있었다.




(2)

첫인상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뉴욕은 뉴욕이었다. TV나 뉴스와 교과서에서 보던 장면들을 직접 보는 경험은 색다르고 때때로 경이롭기까지 했다. 유명한 미술관에서 더 유명한 그림들을 본 일, 브로드웨이에서 할인표를 구해 이해도 못 하는 뮤지컬을 본 일, Nas의 랩을 들으며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 피자를 사먹고 빈티지 샵에서 옷을 샀던 일,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센트럴 파크에 누워 여유롭게 낮잠을 잤던 일까지.

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미국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상징물인 자유의 여신상. 비록 배를 타고 슥 지나가며 봤던 거였지만 그 감동은 단연 최고였다. 어느 지점에선 울컥하기까지 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선 안 그랬는데 자유의 여신상에선 그랬다. 경험에 우열을 가리는 것도 웃기지만 나에겐 그랬다. 맥빠지는 소리지만 버킷리스트였던 '뉴욕 정상에서 제이지 노래 듣기'가 반쪽의 성공만 거뒀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했던가. 엠파이어 빌딩을 올라갈 때가 딱 그랬다. 입장권을 끊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까지는 무척이나 설렜다. 하지만 막상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야경은 쇠창살로 둘러져 있어 잘 보이질 않았고, 생각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모습은 그 정상에서 볼 수 없었다. 사실 당연했다. 엠파이어 빌딩 정상에선 엠파이어 빌딩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야경 속의 그 모습을 보려면 차라리 맞은편의 록펠러 센터 정상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나는 미처 몰랐고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지 않는 뉴욕의 야경을 바라봤다.

붐비던 관광객들 사이를 비집고 겨우 쇠창살 쪽에 붙었다. 그래도 계획한 대로 제이지의 노래를 들으려 핸드폰을 켰다. 그런데, 아뿔싸 또 한 번 문제가 발생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10퍼센트도 안 되는 것이었다. LA의 새벽에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하는 수 없이 노래는 온전히 다 들을 수 없었고, 전주와 랩은 스킵한 채 바로 후렴구부터 노래를 틀었다. 당연하게도 감동은 반감됐다. 급하게 들으려다 보니 노래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못가 핸드폰도 꺼졌고 아쉬운 마음에 멍하니 뉴욕 야경을 더 바라보다 내려왔다. 내가 기대했던 건 절정의 감동과 환희 그리고 전율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달랐다.


그래도 남은 배터리로 겨우 야경 몇장을 찍고, 다음날에 록펠러 센터를 갔다. (좌)엠파이어스테이트 뷰, (우)록펠러 센터 뷰



(3)

완벽함은 함정이다. 모든 게 항상 완벽할 순 없다. 나도 그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완벽한 걸 항상 추구했다. 스스로가 정한 기준은 높았고 그래서 디테일에 목을 매다 가끔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할 때도 많았다. 물론 미리 배터리를 챙기지 못했고, 빌딩의 뷰가 어떤 모습인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철저히 준비했더라도 과연 내가 원했던 만큼의 감동과 전율이 있었을까?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자유의 여신상이 훨씬 감동이었는데 말이다.


너무 큰 기대를 하거나 기준을 높게 잡는 방식은 버리는게 좋단 걸 얼마 전부터 깨달았다. 나라는 사람은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결점도 많은 존재다. 사실 누구나 아니 모든 것엔 결점이 있다. 상황에 따라 중요한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다들 눈치를 못챌 뿐이다. 따라서 그런 불가능한 완벽함을 추구하다보면 남는 건 괴리감인게 당연하다. 그러니 조금 덜어낼 필요가 있다. 괴리감이 커지면 완벽이란 함정에 빠져 시도조차 못하는 겁쟁이가 된다. 그 부분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 사실 고백하자면 몇 번 그런 겁쟁이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 뼈저리게 느낀다. 너무 높은 기준과 이상은 나를 더 움츠리게 만들 뿐이라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정상에서의 순간은 분명 기대와 달랐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름의 분위기와 운치도 있었다. 광활한 야경과 조용하고 분주한 소리들. 기대한 전율과 감동은 아니었으나 다른 느낌의 감동도 있었다. 정상에선 핸드폰이 꺼졌지만 친절한 다른 관광객을 만났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사진을 찍어주곤 메일 주소를 받아 갔다. 비록 내가 주소를 잘못 적은 바람에 사진은 돌려받지 못했지만 분명 의미 있고 뭉클한 기억이다.

이처럼 여행엔 항상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LA 때도 그랬고 뉴욕에서도 그랬다. 만약 언젠가 다시 뉴욕에 갈 일이 생긴다면 전보단 덜 기대하고 갈 생각이다. 물론 제대로 듣지 못한 제이지의 노래를 다시 들을 테지만 너무 목 매진 않을 거다. 대신 무슨 일이 생기건 이전보다 더 그 순간을 즐길 계획이다. 그런 예상 못함의 순간들이 여행의 묘미니까.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인생도 마찬가지일 거란 느낌이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거나 겁먹진 말아야지. 쉽진 않겠지만 재미는 있을 거다.

이전 14화 프리스타일 공연을 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