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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Mar 30. 2024

원정

자전거 타는 여자, 요리하는 남자


 나흘 뒤 새벽이었다. 하필이면 왜 토요일 새벽인가. 친구만 아니라면 이런 피곤함은 없을 텐데. 무슨 원정을 가면 거기서 사 먹으면 되지 웬 친구 타령. 게다가 메신저로 전 달되어 온 주문 이름도 이상하고, 왜 이리 디테일한 건가. 난 ‘맛있는 밥 한 끼’의 아일랜드 식탁을 앞에 두고 손님과 맞닿아 서로 이야기 나누기 좋아하는 요리사라고. 지금 내 가 만든 음식을 바로 앞에 앉은 손님에게 내어놓는 일에 만족하는 요리사라고. 도시락 배달하는 요리사가 아니라. 한데 친구라는 이유로 몇 가지 요구 사항과 예제를 전달해 놓고는 전화를 끊고, 메신저에 답도 안 할 정도로 바쁜가. 이건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너무한 처사 아닌가. 하지만 장사 중에도 나흘 동안 내 골머리를 앓게 하는 숙제처럼 안고 있었다.


현우의 ‘가자 gO!’ 숍 앞에는 검은색 11인승 승합차가 서 있었다.


— 이렇게 늦게 주면 어쩌냐. 팀 사람들 다 차에서 대기하고 있잖아.


— 어? 거의 맞춘 거 아닌가? 야, 영업시간보다 특별히 일찍 달라고 해서 서두른 거야. 자. 어서 가져가.


— 얘들아. 자 봉크백에 나눠 넣어라.


— 봉크백? 뮤젯인가 뭔가라며.


— 응. 그게 그 뜻인데. 뮤젯백, 봉크백 다 같은 목적으로 비슷한 모양으로 써. 나 바쁘다. 우선 다녀와서 보자고. 마무리하고 가게로 갈게.


— (‘오지 마, 나 피곤하다.’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떼려 는 순간 가 버리는 현우에게...) 으, 으응.


차에 있던 성희는 준석을 향해 가볍게 목례만 하고는, 어찌나 바쁜 순간인지 차 위로 자전거를 올려 고정하고, 봉크백에 받아 든 준석의 중간 보급용 음식을 나눠 담기 바쁘다. 대충 11 인승으로 보이는 승합차 위로 자전거가 열 대 가까이 거치되어 있었다. 성희가 봉크백을 차량 안으로 하나씩 전달하면 차량 안의 사람들은 순서대로 사이좋게 나누어 받아 들었다.


대청호로 달리는 차 안. 승합차 운전대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성희는 잠시 눈을 붙인다.


현우는 자전거 숍 ‘가자 gO!’의 마케팅·홍보 방법으로 성 희가 제안한 두 팀을 운영해 왔다. 자전거를 판매만 하는 게 아니라 유지·관리까지 해 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전달되기에 좋았다. 단순히 판매만 하는 곳 이 아니라 운동하는 방법까지 도와주는 숍이라는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성희의 제안이었다. 현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바로 SNS에 마음 맞는 이들을 모아 주말에 함께 운동하거나 원정을 다녀오는 팀을 꾸렸다. 실력 수준 차이를 감안했다. 실력 차가 큰 사람들을 한 팀으로 묶어 서 크게 운용할 경우 가르쳐 주려는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사고의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팀은 초급자로 막 스포츠 사이클을 입문해서 배우는 팀과, 다른 한 팀은 중급자 이상으로 현우가 주축 이 되어 투어 겸 원정 라이딩도 자주 가는 팀으로 꾸렸다.

충북 청주시와 옥천·보은군에 걸쳐 있는 인공 호수. 오늘 은 중급자 이상 팀이 이 인공 호수 주변을 돌고 돌아 최소 75km 거리의 코스를 달린다. 코스를 돌아본 사람이 많지 않아서 속도계에 경로 데이터(GPX 데이터)를 받아 길안내 모드로 탄다. 그래도 별 걱정은 없다. 속도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아름다운 광경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앞을 버리고 주변을 관광하듯 즐기며 가는 것도 낙이니까.


성희에게 대청호를 끼고 일주하는 라이딩 코스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호수 주변의 도로는 한적했고, 노면 상태도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으니까. 초반부터 평균 6% 경사도로 이어지는 피반령은 해발 360m 수준의 작은 고개였다. 사실 이 고개의 업힐보다 걱정은 다른 것이었다. 속도계에 나타난 다운힐 이후의 예고된 고도선. 등락이 많진 않지만 평지 위주의 스프린터로 보기엔 아직 중급자에게도 좀 부 담스러운 수준이었다. 분명 평지 구간은 스스럼없이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테고, 힘이 빠져 뒤로 흐를 것 같지 않은 현우나 선배들의 허벅지와 장딴지를 믿어야겠다 싶었다.


성희 예상은 적중했다. 우선 피반령에선 힘을 아꼈다. 말 그대로 샤방 모드 업힐을 했다. 가장 먼저 달려 나가는 선 배들의 모습에서 딱 한 가지만 바랐다. 설마 늦는다고 버 리고 가진 않으시겠지. 다행히 피반령에서 각종 포즈로 사 진 촬영을 하고 편히 쉬다가 다운힐로 들어섰다. 샤방 모드의 증거로 평속 3을 마치 평속 30 이상인 양 피니시 라 인에서 포디움에 올라갈 기쁨을 선언하듯이 두 손을 번쩍 드는 몹쓸 연출도 해 봤다. 하지만 운동의 즐거움은 여기 까지였다.


이후 작은 낙타 등을 따라간다. ‘작은’이라고 표현하는 이 유는 등고 차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원하게 속 도 25~30 정도를 오르내리며 달린다. 옆으론 푸른 호수와 녹음과 잔잔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매우 잔잔하고 감성적인 뷰가 눈 안에 들어와 흐른다. 성희는 자신도 모르게 라 이딩 중에 위험한 용기를 낸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 고자 한 손의 장갑을 빼서 입에 물고, 저지 뒤쪽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휴대폰을 꺼내어 연신 촬영 앱의 셔터를 눌러 댄다.


코스 중반. 새벽을 맞이하는 시간에 아침도 대충 때우고 출발했으니 이즈음 되면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배고 픈 상황에서의 라이딩은 십중팔구 봉크를 부른다. 이제 앞 서가는 현우의 신호로 봉크백에서 하나둘씩 중간 보급식을 꺼내어 입에 문다. 속도는 20 정도로 줄인 상태에서 천천 히 가면서 한입에 물고 모두들 식사를 한다. 다디단 초코 향과 어우러진 바나나가 은근히 배어 있는 담백한 밥이다. 아삭아삭 중간중간 씹히는 식감이 그냥 삼키지 못하게 만든다. 역시 중간 보급식으로 먹던 시중 판매용의 그것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리고 꿀맛이다. 라이딩 팀 구성원들이 한 팩을 맛있게 먹고 나서는 다들 엄지를 치켜든다. 맛있다는 뜻이다. 거의 없던 일이다. 역시나 준석 셰프의 세심함이 묻어나는 힘이다. 갑자기 속도는 30을 넘어간다. 식사를 했으니 다들 힘이 나는 게다.


이후, 낙타 등의 연속. 사실 성희는 잘 몰랐는데, 짧지만 업힐과 다운힐, 그 사이사이 오픈 구간과 어택, 마무리는 숨이 멎도록 속도를 내 볼 수 있는 낙타 구간이다. 내리막에서 빠르고 힘 있게 페달링 하면 다음 오르막의 중반까지 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잠시 서서 페달링 하는 댄싱을 곁들이면 다음 언덕의 정상까지 큰 힘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이게 낙타 등의 힘이자 매력처럼 느껴져 성희는 처음 가는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었다.


후반 코스로 갈수록 낙타 등의 고도차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한두 명씩 간격(인터벌)도 길어진다. 허파가 타 들어가듯 가빠진 숨은 나도 모르는 무아지경의 상태로, 오르고 내리기를 즐기는 가운데 아뿔싸. 현우가 성희를 추월해 앞으로 치고 나간다. 양 두 줄로 우뚝 뻗은 현우의 등근육 이 리드미컬한 스탠딩 페달링(댄싱)과 함께 춤을 추며 바람을 가른다. 멋지다. 저 모습. 질 수 없다. 자, 지금이다. 허벅지가 쫄깃해지도록 스프린트 페달링. 으라차차! 따라간다. 따라간다. 따라간... 다... 하다가 성희 자신도 모르게 그만 우라질 질주 본능에 충실해진다. 그리고 코스이탈. 성희도 모르게 종료 지점으로부터 1km는 더 나가 버렸다. 그나마 길을 잘못 들어섰어도 1 km밖에 안 되어 다행이다.


라이딩 코스 주변으로 펼쳐지는 파란 호수와, 따스한 기 운과, 시원한 바람과, 맛있는 음식과, 등고선의 난이도와 함께 흐르고 흘렀던 땀과 숨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라이딩 경험을 만들었다. 성희에겐 한마디로 자전거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원정하는 의미였다.


돌아오는 차 안. 현우와 나란히 맨 뒷자리에 앉은 성희는 궁금했다.


— 역시 원정은 이런 맛에 달리는 거 같아요. 아름다운 호수도 보고.


— 그래? 한데 뭘 그리 연신 페달링이냐. 딱 중간 보급 때만 느려지더군. 하하. 준석이가 준 밥이 그리 맛있었어?


갑자기 준석 셰프 이야기는 왜 또. 라이딩의 웜업이 끝나고 페달링에 들어가듯, 준석 셰프에 대해 이성으로서 관 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걸 현우 오빠도 느낀 걸까. 잠시 화 제를 돌려야겠다.


— 쳇. 오빤 언니가 뭐라 안 해요? 애들 안 보고 이렇게 멀리 와도?


— 안 그래도 지금 이렇게 집으로 달리는 차 안 아니겠니. 너는 집에 가면 샤워 한 번 시원하게 하고 그냥 대자로 누워서 쉴 수 있겠지만, 난 팀카 정리하고, 장비 점검도 해야 하는데. 집에 가면 애들과 또 씨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마나님이 가만두지 않으시겠지?


— 힘들겠어요. 하하, 그래도 우린 자전거로 뭉쳐서 즐겁게 놀다 가는 것이니 감수하세요.


— 넌 결혼 안 하냐? 그렇게 일, 일, 일만 하고, 운동만 해서 언제 연애하고 언제 결혼할래? 마흔 넘기면 힘들걸?


— 서로 아픈 곳 찌르자는 거지 지금?


— 하하. 그런 건 아니고. 준석이 어때. 함 생각 있음 말해. 언제든. 내 진정한 친구로서 진심으로 둘의 연을 이어 주고 싶은 맘에 그런 것이니 오해는 말고. 준석이에 대해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 물어보고.


살짝 설레지만 내색하긴 싫었다. 하지만 속마음에 있던 생각을 들킨 것 같았다. 조용한 그의 성품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걸면 웃어 주는 건, ‘내가 손님이어서겠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단정이 아니길 바랐다. 혹시 모를 다른 이유는 없을까. 관대함이 아니라 관심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새록 오르기 시작한 시점이랄까. 가끔 주말이 아닌 평일 야근 후, 탄천로를 지나 퇴근길에 불 켜져 있는 그의 가게를 멀찌감치 보곤 했었다. 비추이는 온화한 등의 빛이 좋았다. 그리고 그 빛은 내 마음속에서 점점 더 커지고, 더 밝은 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입구 창문 안을 힐끔 보고 지나가곤 했다. 그런 마음이었다. 불현듯 생각나 현우 오빠에게 물었다.


— 음. 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준석 셰프님 팔은... 다치신 거래요?


— 웬 님? 하하. 너 살짝 마음에 있구나. — 아, 참. 너무하시네.


얼버무리고 말려는데, 현우 오빠는 설명을 시작했고, 난 진지하게 한참을 들었다.


그의 유학, 그리고 한 여자. 그리고 사고. 어쩌면 그의 무심한 표정이 이해되었다. 첫사랑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그냥 지나간 사랑인데 마음속 상처에다 더 얼룩진 몸의 상처. 게다가 요리사에겐 치명적인 팔의 상처라니. 더 자세한 건 필요치 않았다. 어머니도, 사람도, 형제도 그의 옆에 이 제 아무도 없다는 현실이 더 안쓰러웠다. 살짝 눈물이 고 인 걸 손등으로 가리고, 피곤한 듯 얼굴을 돌려 창밖을 향 했다. 안쓰럽다. 이미 오래전 지나간 인연은 과거일 뿐. 부 담이 느껴지기보다는, 그가 다시 사람을 마주 서지 못하는 이유로 잊지 못하고 아파하는 게 싫다. 준석 셰프. 아니 이 제부터 준석 씨라 부르기로 하자. 그에게 더 다가서 봐야겠다.


어느새 차 안은 운전하는 서포터를 빼고 모두들 피곤에 잠든 상태였다. 두 시간여를 달려 현우 오빠 숍에 도착했다. 피곤함이 밀려온다. 모두 자신의 자전거를 거치대에서 내려받아 들고는 집으로 향한다. 성희는 집으로 향할 수 없었다. 현우 오빠가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현우 오빠에게 준석 씨 가게에 들르자 했다. 오랜 시간은 어렵단다. 아이들이 기다린다며, 잠시 들러 보급식 준비에 대한 감사 인사만 하고 가겠다 한다. 다행히 가게 안은 장사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고 준석 씨는 Closed 푯말 뒤로 테이블을 정리 중이었다.


‘드르륵.’


— 다녀왔다. 성희도 인사하고 간다고 해서.


— 어, 잘 다녀왔어요? 피곤해 보이네요. 좀 가서 쉬시지.


— 차 한잔하고 갈까 해서요.


현우는 빨리 가려는 듯 말머리를 잡아챈다.


— 자. 난 가야 해서. 둘이 이야기 나누고, 현우야 좋은 소식 하나, 안 좋은 소식 하나가 있다. 뭐부터 들을래?


— 야, 너 새벽에 일 시키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러지 말자 좀. 아무거나. 어차피 이야기할 거면 얼른 하고 가.


— 하나는 잭팟! 너의 보급식에 모든 팀원들이 만족해했다. 덕분에 오후까지 신나게 달렸어.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1박은 난 유부남이라서 못 가거든. 다른 팀원들도 바빠서 1박은 지양하는 터라 앞으로 자주 부탁 해야겠다.


— 안 돼! 안 햇! 난 새벽에 잠자고 장사 준비하기도 바 빠.


— 에이, 알았어. 가끔 좀 부탁할게. 자. 성희랑 이야기 나누고. 아, 참. 미안한 이야기도 하나 있는데, 내 너의 모든 치부를 아는 좋은 친구로서, 서로 호감 좀 가지라고 했다. 네 얘기. 성희에게. 팔에 웬 상처인지까지.


‘드르륵.’


말 끝나기 무섭게, 묻을 닫고 가 버리는 현우 오빠에게 어이없어하는 준석 씨. 잠시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 다. 갑자기 마지막 말에 그렇게 던지고 가면, 급경색된 감정을 어쩌라고 저러는지.


— 녀석이 원래 남의 일 간섭하길 좋아합니다. 해서 별명 이 답작 대마왕이었어요. 오지랖이 하늘을 찌릅니다.


애써 분위기를 다듬어 보려는 투였다. 성희는 아무 말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어디까지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어요. 한데 그냥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잊으셔도 됩니다.


— 아니에요. 현우 오빠가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제가 물어봤어요. 힘든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후련해지신다면 들을 수 있어요. 전 항상....


앞뒤 말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 르고 미안한 마음에 성희는 그저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일 뿐이고. 이젠 지난 일이니까요. 이제 슬슬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차가워지려 하는 거 같아요. 아마 내년 여름부턴 복장을 바 꿔야 할 듯해요.


웃어 넘겨주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숙제 하나를 풀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넌지시 화제를 바꾸는 느낌이 들 어 함께했다.


— 어떤 복장으로요?


— 아무래도 이 무거운 셰프 캡은 낮고 가벼운 걸로 하고, 반팔 조리복으로요. 그게 나을 듯해요.


조금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상처가, 더 이상 복 장으로 가릴 필요가 없다고 느끼길 바랐다.


— 네. 반팔이 시원하죠. 이거 보세요. 전 사 입지 않아 도 반팔이 있어요.


더 후련해지라고. 자신의 이야길 꺼냈다. 팔뚝에 그어진 사이클 탠 라인을 보여 주며 연신 두 팔뚝을 들어 올렸다. 준석 씨는 눈이 동그래지며 웃었다.


— 아니, 그건 어떻게 생긴 건가요?


오늘처럼 원정 가서 사이클을 오래 타면 생기는 탠 라인이다. 처음 보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 준석 씨를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 이런 자욱이 당신에게는 조금이나마 위 안이 되는 동질감으로 비추어지길. 그리고 그가 웃으며 언 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사이가 되길 바랐다.


그가 과거의 상처를 웃으며 이야기하는 데에 내가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의자 위로 다리를 턱 올려놓고, 허벅지까지 옷을 들어 올려 사이클 라인을 보여 주려는 내 모습에 준석 씨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얼굴이 불그레해지는 걸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듯했다.


— 엇. ...흐흠. 거기까지만 하시죠.


— 하하하. 부끄러워하시기는. 자덕에겐 항상 있다는 사 이클 탠 라인이에요. 팔다리에 다 생겨요. 사실 대중목욕탕이나 탈의실에서 사람들이 팔토시에 반바지 입고 들어온 사람 보는 것처럼 모두 쳐다봐서 힘들지만요.

 



#셰프 로그: 회복에 좋은 보급식


뮤젯 오더!


1. 안장 위에서 먹을 음식이라니 한 손으로 들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

2. 손으로 잡고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 오랜만인데.
3. 쉬이 상하지 않아야 하면서 무게는 가볍게.
4. 그냥 샌드위치나 말아서 줄까 싶었는데, 심지어 빠르게 이동 중에 먹는 음식이니 부산하게 흐트러지거나 떨어지면 안 된다니.

5. 것도 영업 중인 시간에 전화해서. 가급적 몇 가지 조 합으로 400 kcal 정도 되는 음식을 준비하란다.


나흘 동안 한참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냥 운동하다 좀 어디 진득하게 앉아서 먹고 갈 것이지 얼마나 시간에 쫓기 길래 안장 위에서 달리며 먹는단 걸까.


우선 뮤젯이 뭔가 찾아보니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용으로 개발된 가방 모양을 뜻하는 듯했다. 옆으로 메는 것 같지만 어깨를 사선으로 가로질러 둘러메는 모양. 이게 왜 뮤젯 오더인가, 궁금했지만 이런 가방에 넣는 음식을 뜻하 는 것으로 이해했다.


자. 그럼 큰 가방도 아니고 안장 위에서 이런 가방을 메 고, 그 안에 넣을 음식물이면서, 손에 들기 좋은 음식으로 준비해야겠다. 그렇다면 손으로 쥐기에 납작하되, 긴 형태의 음식으로 준비해 주어야겠다. 바로 떠오르는 건 우리 고유의 음식 ‘떡’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안장 위에서 먹는 음식으로는 좀 문제가 있겠다. 숨 쉬는 가운 데 음식물이 목에 걸린다면 낭패일 테니. 그럼 떡 모양이 되, 식감은 좀 더 부드러운 빵이나 케이크처럼 목 넘김에 부담 없이 만들면 되겠다.


그렇더라도 단순 빵이라면 어디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 고. 너무 정성 없다 소리 듣기에 좋고. 탄수화물 음식이지 만 쌀에 비해 열량 함축이 적고. 그래, 쌀로 만든 바 형태로 케이크를 만들면 되겠다. 1 인당 두 개씩 정도의 밥 한 공기에 볶음 형태의 소시지나 고기를 갈아서 채우자. 열량 도, 식감도, 목 넘김도 이 정도로 해결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운동 중 근력에 좋은 과일을 활용하면 좋겠다.


근력 회복용으로 대표적인 과일은 바나나와 견과류. 하지만 바나나는 손으로 잡기엔 좋지만 껍질이 문제고. 견과류 는 그 자체가 식감이 딱딱하다.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하면 방법이 좀 보인다.


우선 밥을 만들고, 이걸 완전히 으깨지 말고 반만 으깬 다. 그 상태에서 에어프라이어로 말린 바나나와 준비해 둔 견과류를 섞고, 잘게 부수어 밥과 함께 다시 으깬다. 백설 탕 조금과 치즈 그리고 올리고당을 살짝 섞어 반죽 형태로 준비하고 밥과 섞어서 만든다. 쿠킹 호일을 마치 에너지 바 형태처럼 직사각형으로 접어 반죽한 밥을 넣고 밀대로 밀어 압축해 준다. 납작하고 길쭉한 형태를 만들자. 마무리로 이 상태로 냉장실에 반나절 정도를 보관하고 퇴근. 자 내일 새벽 빼면 약간은 찰진 상태로 먹을 수 있게 되겠다.


피곤한 새벽이다. 앞으론 이런 오더 안 들어줄 거다.




조우


초가을로 접어들며 태풍이 일었다. 그리고 일주일 새 또 날씨는 많이 달라졌다. 초가을 태풍이 오간 자리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쓸려 내려온 나뭇가지들이 탄천로 산책로에 즐비했고, 천에서 뭍으로 올라온 진흙이 찰지게 자리 잡혀 있어 미끄러웠다. 때때로 강한 바람에 쓰러져 버린 나무가 밑동이 드러나 부러진 채 길을 막고 있다. 이렇게 자전거 도로를 막고 있는 경우가 많으면 당연히 돌아가야 했다. 이럴 땐 라이더도, 차도 별로 없는 코스가 오히려 안 전하고 제격이다. 오늘은 평균 경사도가 높지 않되 한갓진 곳으로 가자. 그래, 오늘 같은 토요일은 하오고개로 업힐을 타자.


같은 생각인지 하오고개 입구에는 많은 라이더들이 이미 도착해서 준비 중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팀으로 온 친구들 도 많았다. 하나둘 힘내어 페달링을 해 본다. 초입에서 올 라 천천히 워밍업. 호흡을 길고 깊게 가져간다. 심박을 서서히 올려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야 한다. 허벅지 햄스트링 도 서서히 달궈지게 초반엔 무리하지 말고 서서히 가자. 기어비는 타이트하지 않고 페달링에 무리 없는 수준으로 낮추어 간다. 오르막의 경사도가 6% 수준으로 변화하면서 서서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허벅지가 슬슬 당 겨 온다. 점점 엉덩이와 허리 근육도 조금씩 써야 한다.


모두들 비슷한 속도로 오르지만 아무래도 남성들보다야 좀 느리다. 하지만 4년 넘게 훈련해 온 운동 경험은 쉽사 리 남자들에 비해 뒤로 흐르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서서히 그들과 펠로톤을 이룬 듯 비슷한 속도로 오른다. 이제 이마를 타고 서서히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상의 저 지가 땀으로 젖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한두 명의 라이더가 나를 제치고 지나간다. 신장이나 몸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여름용 저지와 빕 그리고 반양말에 사이클 슈즈를 신고 있고, 여름 내내 햇빛에 그을려 구릿빛 팔다리를 하고 있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나는 안장에 앉은 채 페달 링을 하고 있고 그들은 서서 하고 있다. 안장에서 일어선 채로 좌우로 흔들며 페달링을 한다.


일반적으로 서서 페달링 하는 경우, 앉아서 앞으로 나가는 속도 대비 빠르다. 항상 체감해 왔던 경험에 의한 비교 감. 배워 보고 싶었다. 함께 운동하는 팀 친구들도 곧잘 하 곤 해서 물어보니 ‘댄싱’이라는 기술이라고 했다. 경사도가 높지 않은 곳에서 연습해 보려 하다가 줄곧 중심 잡기가 힘들어 페달을 밟고 서자마자 다시 안장에 앉곤 했다. 그 일어서자마자 빛과 같은 속도로 앉아 버리는 모습이 우스 꽝스러웠는지, 주변 팀원들이나 처음 보는 라이더들이 힐 긋 보고는 픽 웃고 지나가 버렸다. 보통 말총머리를 한 여 성 라이더에게는 친절들 하다고 해서 말총머리를 헬멧의 보아다이얼 위로 빼내는 신공까지 부려 봤는데 말이다. 그 저 동네 라이딩 중에도 지나쳐 가는 속도를 용서하지 않는 ‘불친절한 것들’. 그러곤 잊고 있었다.


보통 지나는 라이더들이 댄싱을 치면 휙휙 소리가 났었다. 타이어 측면 부위와 아스팔트가 닿아 나는 소리였다. 불친절한 이들과 달리 오늘은 다른 이가 나타났다. 또 한 번 용기를 냈다가 이내 흔들린 중심에 좌절하고 앉아 버리 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바로 뒤로 따라붙어 “좀 가르쳐 드 릴까요.” 하는 거다. 말을 거는데 옆도 아니고 뒤라니. 살 짝 부담스럽고, 얼굴도 보지 못한 이에게 “그래요.”라고 긍정하는 모습은 좀 아닌 것 같다 싶어 단호하고 짧게 이야 기했다.


— 괜찮아요.


옆으로 주행로를 변경하며 다가와 한 번은 더 물어봐 주 거나 친절도에 걸맞은 멋진 얼굴을 보여 주려나 싶었지만, 내심 기대는 값싼 오해라고 인증하듯 여유감이라곤 1도 없이 지나가 버린다. 내 등짝을 보고 이야기했듯 자신의 등짝을 보고 후회하란 뜻인가. 그러곤 살짝 빈정 상하려는 데, 저지 뒤편 작게 쓰여 있는 로고.


— 낙동중!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랬다. 얼마 전 가평에서 만났던


그 학교의 남색 저지다.


— 어? 혹시?


뒤로 돌아보며 글라스를 벗더니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바로 날 알아봤다.


— 누나! 안녕하세요.


길가로 옮겨 세웠다. 까까머리 그 녀석이었다.


— 어, 그래. 오랜만이네. 그때 이름이... 미안.


— 킴주니입니다. 킴준.


— 아, 그래 준아. 낙동중 저지 보고 누나도 모르게 학교 이름부터 불렀네. 카 잘 지냈어?


반가운 마음에 허리 숙여 인사하는 준이의 어깨를 툭 치며 인사했다.


— 네, 네.

— 어? 근데 오늘은 혼자네? 팀은?


— 토요일이라 운동이 없스므니다. 혼자 리커버리 나왔스니다.


— 업힐이 리커버리야? 하하. 역시 선수는. 대단해.


— 아. 짧고 천천히 타는 곳이라, 땀만 조금, 워밍업 하러 나왔어요.


— 한데 학교는 가평 쪽 아니니?


— 아. 가평이 맞는데 몇몇 친구들 집이 이쪽입니다. 고 맙게 주말에도 기숙사가 생겨서, 이곳 가까운 분당에서 숙 소 생활하고 있어요. 가까운 운동할 만한 곳이 이곳이라 나왔고요.


본의 아니게, 준이에게 내 몹쓸 댄싱 실력이 드러나 버렸다. 하긴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더 창피했을 수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선수가 왔으니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좀 배워 볼까 싶었다.


— 잘됐다. 온 김에 같이 타면서 내게 댄싱을 좀 가르쳐 줄래?


두어 시간 탔을까. 쉬지 않고 댄싱을 연습하며 하오고개를 네 번이나 올랐다. 준은 친누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살가웠다. 어눌한 말투의 한국어. 반말도 섞여 있지만 귀엽다. 그간 알고 있던 댄싱 방법과는 좀 다르게 가르쳐 준다. 우선 자꾸 좌우로 흔들려하지 말고 서서 페달을 돌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충분히 페달 위에 서는 중심 잡기를 먼저 해야 한단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일어서서 천천히 회전해 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연습에만 우선 집 중. 우선 서는 중심을 잡아야 댄싱의 시작이란다. 이렇게 하오를 한 번 오르며 연습해 보니 조금씩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요령이 생겼다.


— 댄싱을 왜 댄싱이라 하는지 아시죠?


— 응? 그러게. 왜 댄싱이라고 하니?


이제 중심을 잡았으니 중심을 유지한 채로 교차하며 돌 리는 발의 순서와 반대 방향으로 좌우로 자전거 핸들을 흔들어 보란다. 페달링의 기준으론 발이 내려가는 쪽의 반대 편으로. 그리고 어깨는 같이 가면 안 되고 중심 잡은 그대로를 유지해야 한다고. 다시 2회전째 하오고개를 오를 때에는 이것만 연습했다. 이후 하오고개를 3회전 업힐 하면서 댄싱을 곁들여 올랐다. 뒤에서 오던 준이 지금 뒤에서 보 면 리듬을 타는 모습이 보인단다. 그래서 마치 춤을 추는 모습과 비슷하단다. 그냥 안장에 앉은 자세보단 수월하게 빠르게 오를 수 있었다. 역시 선수에게 배우니 뭔가 좀 더 쉽게 몸에 익힐 수 있었다.


— 너무 숨이 차다. 휴우....


— 당연하죠. 댄싱을 하면서 힘을 더 쓰게 되는 거고, 그 힘을 더 쓴 만큼 댄싱을 마치는 순간 심박은 오를 수밖에 없어요. 댄싱에서 다시 안장 위 앉은(시팅) 자세로 돌아오면 숨을 더 잘 다스려야 해요. 복식호흡 하듯이 들이켰다가 내 쉬기를 잘 반복하면 심박은 다시 안정되고요. 저흰 평로라를 타면서 이 호흡과 같이 연습하는데 누나도 해 보시면 금세 늘 거예요.


하오고개 정상 부근.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쉬고 있었다. 준과 나도 잠시 쉬어야겠다며 정상 부근 공터 가까이 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앉았다. 이럴 땐 기분이 남다르다. 힘들지만 무언가 배우고 성장한 것 같은 느낌. 오랜만이다. 준이도 나도 웃고 있다.


— 역시 선수에게 배우니 다르다. 쉽게 가르쳐 줘서 고마 워. 자, 이거.


하루 운동하는 사이에 금세 댄싱의 많은 부분을 익힌 듯했다. 고마운 마음에 저지 뒤에 찔러 두었던 초코 바 하나를 건네며 앉았다.


— 금세 배우시네요. 누나도 운동 감각이 꽤 있으신 거 같아요. 지난번에도 페달링의 좌우 밸런스가 좋았어요. 그래서 잘 타신다고 느꼈는데 오늘은 순발력도 있어 보이세요.


— 그래? 선수에게 이런 평가를 받으니 기분 너무 좋은 걸?


— 헤헤. 이제 중학생인데요, 뭘. 감독님이 그러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열심히 근육을 사이클용으로 만들어야 한대 요. 힘을 모아 그렇게 끌어올려야 사이클 선수로 계속 갈 수 있을지 알 수 있대요. 그래서 쉬는 날도 놀지 말고 계속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 그렇구나. 준이는 꿈이 뭔데? 계속 사이클 선수로 갈 건가 보구나?


— 당연하죠.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죠. 할머니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사이클을 잘 아셔서 저에게 응원도 해 주 실 거예요. 열심히 해서 좋은 선수가 되어 한국,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우선 목표고요. 그다음엔....


— 그다음엔?


— 그다음엔... 유럽 콘티넨털 팀에 입단하는 게 꿈이에요. 콘티넨털 3대 리그에 참가해 보는 게 꿈 이거든요.


#콘티넨털 3대 리그. 사이클 선수라 하면 보통 국내 대회에서의 우승을 이야기하는데 이 친구는 떡잎부터 다른 것 같다. 월드 사이클 대회의 참가를 꿈꾼다는 건 사이클 대회를 아는 순간부터 모든 이가 꿈꾸는 로드를 탄다는 것.


— 아시아 대회나 올림픽 우승도 중요하지 않니?


— 아, 물론 중요하죠. 입상 경력이 있어야 하기도 하고 요. 하지만 콘티넨털 리그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달려 보고 싶어요. 캘럽 이완처럼 멋지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전 가벼우니까. 그리고 지로 디탈리아에서....


— 응, 지로 디탈리아에서?


연신 꿈의 나래를 이야기하며 눈망울이 움직였다. 설렘과 열정 가득한 눈망울이었다. 그러던 준의 표정이, 물을 마신 후 잠시 머뭇거리며 멈추었다.


— 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났고, 아직 아버지가 일한다는 이탈리아 그곳에 꼭 가서 아버지를 만나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지로 디탈리아 대회에서 타는 모습을 보 여 드리고 싶어요.


— 음. 그래. 아버지와 떨어져 있나 보구나. 누난 디탈리 아 리그가 아니라 디탈리아 리그가 열리는 그 로드에서라도 한번 타 보고나 싶다. 멋진 꿈이야. 할 수 있을 거야. 캘럽 이완처럼. 그래. 캘럽 이완처럼.


— 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은... 아, 아니에요. 아무튼 전 꼭 제 꿈을 이룰 거예요.


— 그래. 누나도 항상 응원해 줄게. 낙동중 파이팅! 까까머리 준! 파이팅!!

— 까까머리? 그게 뭐예요?


— 아, 아무것도 아냐. 그런 게 있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다음번 훈련 코스로 여기 오게 되면 꼭 연락해 주기 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 고장의 라이딩 코스는 누나가 꿰차고 있거든. ^^


준과 일부 구간을 함께 달리다 헤어지기 전 단순한 인연 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아니고, 같은 곳도 아니었고, 그것도 인위적으로 걷는 상태도 아닌 운동 중 안장 위라니. 작지 않은 인연이라는 생각과 앞으로도 서로 이야기할 것, 배울 것이 많으리라는 기대감도 함께했다. 마무리 신호대기 중, 잠시 길가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여느 때처럼 ‘맛있는 밥 한 끼’로 간다. 댄싱 연습을 많이 해서인지 허벅지가 뻐근하다. 천천히 페달링 하면서 뭉 칠 것 같은 근육을 풀자. 이럴 땐 힘이 아니라 페달링의 회전수로 가야 한다. 쿨다운. 케이던스. 쿨다운. 케이던스. 마음으로 대뇌이며 간다.


— 어서 와요. 오늘도 신나게 탔나 봐요? 얼굴이 많이 그을렸네요.


— 아, 네. 지난번 만났던 낙동중 선수를 하오고개에서 또 만났지 뭐예요.


— 아. 그래서 오늘은 힘드셨구나. 그럼 근 손실을 줄여 주는 단백질 가득한 고기를 대령해야겠네요. 사실 한 시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요. 거의 다 되어 가니 잠시만 기다려요.


한참을 그릴 주변을 서성이는 준석 씨. 바로 후드로 연결되는 제일 안쪽 그릴 위에 큰 박스가 올려져 있었고 그 안에서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불을 끄더니 박 스 안으로부터 이내 구수한 고기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고기 냄새만이 아닌 나무 타는 냄새도 함께. 시골길 가면 창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구수한 장작 타는 냄새 같다. 새로 장만한 훈연 박스란다. 단순히 굽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훈연한 살코기를 가급적 근막을 제거한 상태로 구워 내어 준다. 훈연된 상태라 구수한 냄새와 함께 매우 부드러운 상태다. 속은 수육처럼 말랑거린다.


— 그 박스는 뭐예요?


— 아, 스모커라는 장비예요. 가끔 사용할 만해요. 훈연시켜서 고기 잡내를 잡아내기 좋고요. 스위스나 이탈리아에서 자주 해 먹는 요리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스모커 박스에서 삼겹 고기 덩어리를 꺼내는 순간 가게 안에 구수한 향내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통삼겹살 그대로 내는 것이 아니라 두툼하게 썰어 낸 고기를 접시 위로 플레이팅 하더니, 로즈마리와 함께 구운 통마늘에 그린 오일을 뿌리고 함께 곁들여 먹으라며 얹어 주었다. 군침이 입 안에서 혀를 타고 경사도 10%의 업힐을 오르듯 댄싱을 한다. 바로 포크를 꽂아 입으로 넣고 댄싱을 완성!


뚝딱 해치우고, 내려 준 차를 한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만난 까까머리 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며 말이 많아지기 시작. 구수하면서 바깥은 바삭하지만 속살은 말랑한 식감을 자랑하는 오늘의 훈연 삼겹처럼 나 홀로 이론만으로 알던 것을 준이에게 훈연되듯 익히게 된 댄싱을 설명했다.


— 어린 친구가 꿈도 있고 부럽네요. 전 그 나이 때 학교 집 밖에 모르고 미래는 생각도 잘 못 했는데. 한데 콘티넨털 대회라는 게 있어요?


— 네. 말 그대로 유럽 대륙에서 열리는 도로 사이클 프로팀 선수들의 대회라 보시면 돼요. 스포츠 라이딩의 백미라 하는 도로 사이클 대회 중에서도 전 세계 프로들만 모이는 대회인데 크게 세 가지 대회가 유명해요.




#라이딩 일기: 콘티넨털 3 대 리그


콘티넨털 프로 3대 리그가 있어요. 쉽게 3대 그랜드 투 어라고도 하지요. 보통 5~6 월 봄과 초여름 사이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지로 디탈리아 대회, 6 월 말에서 7 월 사이 열 리는 프랑스의 투르 드 프랑스 대회, 가을 시즌 9월에 스 페인에서 열리는 부엘타 대회입니다.


대회 중요성이나 규모 면에서 볼 때 작은 대회부터 설명드리자면,


— 부엘타 리그: 1935 년부터 약 60 여 회 열린 부엘타 리그는 스페인 전체를 가로지르며 치러지는 대회예요. 매 년 다른 경로를 타게 되지만 하루 한 스테이지당 평균 240km를 24일간 달려야 하죠. 투르 드 프랑스 경기가 만 들어진 배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부엘타 리그 역시 일간 지 홍보를 위해 만든 대회예요. 유럽에서 가장 급경사인 23%의 산을 올라야 하는 무지막지한 코스를 자랑합니다.

종합 우승자에겐 황금 저지를 수여하고, 산악 구간을 잘 오르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클라이머 저지와, 평지를 가장 빨리 달려 많은 포인트를 얻은 스프린터에게 주어지는 상 이 있고요.


— 지로 디탈리아: 역시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 영감을 얻어 신문 편집자가 판매 촉진을 위해 만든 대회예요. 1909년 5월 13일 첫 대회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90여 회 대회가 열렸어요. 2017년 100회 대회가 열려 톰 듀물 랭 선수가 종합 우승을 했죠. 종합 우승자에게는 다른 대 회와 달리 핑크색의 저지가, 산악 구간을 잘 달린 선수에 겐 녹색 저지가, 종합 포인트 경쟁에선 좀 생경한데 자색 저지가 수여됩니다. 이채로운 것은 유럽 각국의 선수들보다 자국 출신 선수들이 최대, 초대 우승자를 차지하고 있어요. 즉 이탈리아 선수들이 이 대회에선 유독 더 힘을 발 휘한다는 특징이 있지요. 종종 준석 셰프님도 겪었다는 자 국 우선주의가 발휘되는 배경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북부 이탈리아 접경 지역 고도 3,000m에 가까운 산악 코스가 아주 극악하다고 유명하죠. 하얀 눈도 보이는 주로를 따라 계속해서 헤어핀을 도는 구간인데 절경으로 불립니다.


— 투르 드 프랑스: 대망의 투르 드 프랑스. 세계 프로 사이클리스트의 최고 대회라 여겨질 만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내로라하는 선수들의 대회죠. 1903 년 프랑스의 한 신문 기자 지오 르페브의 아이디어로 신문의 홍보를 위해 시작된 대회이고 107회가 넘은 상태예요. 이 신문의 종 이 색이 노란색이어서 우승자에겐 옐로 저지가 주어지는 것으로 유명하죠. 초여름까지 이어지는 대회로 총 21 개 스테이지, 누적 3,500 km를 달리는 대회입니다. 대회 종료 날 선수들의 온몸에는 수분이 빠져나간 상태의 앙상한 근육들 만 보이기도 합니다. 20 개 이상의 팀이 팀당 8 명씩 출전 해서 총 180여 명이 경기를 치릅니다. 가장 큰 대회이니만 큼,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데 총 100여 개 채널로 190여 개 나라에 송출되죠.

6천만에 달하는 관중들이 투어 코스에 운집해서 직접 응원을 하는 대회로도 유명해요.


이 대회들 대부분 총 21개 스테이지(1일 1스테이지, 150~200km 구간 단위)를 달려야 하는데 세 가지 형태의 스테이지로 나뉩니다. 가장 빠른 스피드 레이싱 구간으로 평지로 이루어진 플랫 스테이지(Flat Stages), 개인별 기록 경기로 공기역학 장비를 갖추고 달리는 타임 트라이얼 (Time Trials), 알프스 피레네산맥을 경유하는 가장 힘든 스테이지인 마운틴 스테이지(Mountain Stages) 혹은 고산 스테이지(Highly Stages)로 나뉩니다. 즉, 프로 사이클 선수라 함은 평지의 속도, 특정 구간을 쉼 없이 달릴 수 있 는 근지구력, 산악을 오르는 지구력과 인내력 등을 골고루 갖추어야 하죠.


1900 년에 설립된, 세계 사이클 연맹이라 불리는 UCI(Union Cycliste Internationale)의 심판진들이 직접 나 서서 경기를 관장하고 비디오 판독 등을 통해 중간에 경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제어하죠. 예전과 달리 요즘 엔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경기 방송 중계 때문에 선수들도 그렇게 자유롭진 않다고 하네요. 하지만 길고 힘든 대회이니만큼 그들만의 서로 존중하는 문화도 생겨났어요. 각 나라의 대부분의 지역을 달리는 경기들이다 보니, 마침 지나 가는 경로의 고향에서 태어나거나 생일을 맞은 선수는 그 구간을 지날 때 선두에 서도록 선수들 사이에서 배려를 해 주기도 합니다. 자전거의 고장이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뒤로 처지는 선두를 앞질러 가려고 힘들게 공격(attack)하는 선수는 예의 없는 친구로 간주하고요. 경기 도중 열량 보충을 위해 보급받는 구역(코치가 봉크팩을 선수들에게 전 달하는 구역)에서 뭔가를 먹거나 소변을 보는 선수를 제치고 어택하는 것도 예의가 없는 행위로 봅니다. 마지막 스테이지가 타임 트라이얼이 아닌 경우, 선두권의 차이가 크 지 않을 경우를 제외하고 누적 스테이지 격차가 커서 우승 할 선수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된 상태라면, 승리의 영광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선두를 빼앗지 않는 무언의 예의도 있어요. 구기종목과 달리 격차가 너무 큰 상황이 자명한 상황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죠. 마지막 스테이지를 무리하게 경주하다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기도 하고요.


보통 한 팀에 8 명의 선수들이 출전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같은 도로 사이클 경주 대회는 어김없이 드러나는 명언 이 있어요. ‘선수가 혼자 우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즉, 팀이 200 km를 넘나드는 스테이지 하나의 우승을 위해 그것도 매일을 함께 달리면서 서로 도우며 달려야 하는 경기예요. 이 때문에 팀 내에서도 그 역할이 나뉘어져 있지요. 크게 도메스티크와 스프린터로 나뉘어요. 도메스티크는 말 그대로 팀 리더를 위해 다양한 임무를 맡죠. 특정 구간 앞에 서서 바람을 막아 주며 끌어주는 역할, 팀 서포트 카로 가서 중간중간 보급식이나 물통을 전달하는 역할 등 다양해요. 스프린터나 리더는 말 그대로 경주를 마무리하거나 스프린트 구간, 산악 정상 지점에서 빠르게 통과하는 역할이고요. 간혹 사이클 기재 고장이 발생했는데 경주가 막바지에 이르거나 긴박한 경우엔 자신의 사이클을 팀 동 료에게 양보하는 경우까지 본 적도 있어요. 즉, 홀로 사이 클을 타는 모습들을 많이 보니 혼자하는 경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정반대의 스포츠라 보시는 게 맞아요.


준석은 놀란 눈을 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해박한 지식이다. 그냥 누적된 정보만은 아니리라. 수년간 계속해서 운동하며 이 같은 지식을 쌓고, 술술 풀어내는 그녀가 남달리 보였다. 지정된 날짜에 패턴화된 운동을 한다는 게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구나 싶었다.


— 대단하네요. 우리 단골 성희 씨. 그냥 운동만 하는 게 아니었군요.


— 별말씀을요. 한데 요리도 이런 대회가 있지 않나요?


— 있죠.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합니다.


— 제가 알기론 요리 대회도 피를 말리고, 끝나고 나면 초주검이 된다고 들은 적 있어요.


— 하하. 죽기까지 하진 않아요. 하지만 피를 말린다고 표현하는 건 맞습니다. 시작 후 제한된 시간 안에 진행해 야 하니까요. 제가 유학 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메트로 팔라 대회, 월드 챔피언십 오브 피자이올로 대회라는 피자 장인을 뽑는 대표적인 대회가 있어 요. 말씀하신 사이클 협회가 있는 것처럼, 당연히 요리 협회도 있죠. 토스카나 세계 요리 대회같이 세계 조리사 연맹(WACS)이 주최하는 대회에서는 사이클 대회처럼 요리사 들이 팀을 이루는데 보통 7명 정도가 한 팀이 됩니다. 주 제는 매년 다른데 콜드 디시가 대표적이지요. 베이킹 1 명, 조리 전공자 6명이 한 팀을 이루어 총 7~8개 정도의 요리를 출품해요. 초콜릿을 포함한 차가운 디저트까지 고려 해야 해요. 어느 대회건, 보통 그 나라 정찬 음식 순서를 잘 고려해서 출품을 합니다. 보통 식전 요리·식전주, 애피 타이저나 전채 요리, 본식 첫 번째·두 번째, 그리고 가니시라 불리는 샐러드 후 후식(돌체)까지 구성하고요.


— 하~ 말만 들어도 쓰러질 것 같은데요?


— 네. 사실 전채 요리의 경우엔 미리 만들어 두어도 됩 니다. 전채 요리는 대회 전날 미리 만들어 내놓고, 대회 날에는 정식 코스 요리 2~3가지를 1시간 이내에 끝내고, 후 식에 좀 더 공을 들이는 시간을 할애하기도 하죠. 참가하는 것 자체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지만, 팀마다 레시피를 내세워 준우승 이상의 성적을 내는 게 쉽지는 않아요. 이야기하다 보니 까까머리 친구가 언제 세계적인 유명 선수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네요. 언제 한번 함께 오세요. 제가 맛있는 밥으로 미리 눈도장 좀 찍어 두게요.


— 아, 안 그래도 학교 팀 훈련이 한두 번 이쪽으로 잡혀 있다고 했어요. 분당 코스로 훈련하게 되면 함께 운동 후 데려올게요.


까까머리는 까까머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랐고, 준석 씨는 요리 대회처럼 스포츠 라이딩도 공신력 있는 대회가 있음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꿈이 있었고, 꿈을 위해 열심히 달리면 결과는 따라오고, 꿈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10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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