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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Mar 31. 2024

희망

자전거 타는 여자, 요리하는 남자


다람쥐


장마도 지났고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주로 다가온다는 태 풍도 지나간 지 오래 건 만. 유난히 주말 사이 비가 자주 오 는 이번 가을은 준석 씨의 가게 운영에 영향을 끼친 듯했다. 여느 때와 달리 장사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준석 씨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 종종 생겼다. 평일 대비 주말 장사가 수입의 전반은 아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데 꼭 필요한 주말 운동에는 영향이 컸다. 성희는 계속 이어진 비 오는 주말을 고려해, 운동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현 우의 조언을 구했고, 성희는 현우가 시험해 보라며 빌려준 장비를 집으로 가져와 설치를 완료했다. 실내 롤러로 불리는 고정형 롤러 장비를 베란다에 설치하고, 인터넷에 연결했다. 일명 온라인으로 여러 사람과 PC나 패드 화면으로 하는, 즉 랜선 라이딩이다. 하지만 바람을 느끼고 나무 냄 새, 흙냄새를 맡을 수 없는 베란다의 케케묵은 빨래 냄새와 함께하는 운동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실로 재미없는 운동이었다.


유독 비 오는 주말이 네 차례나 이어지는 9월 말, 단 하 루 비 그치고 흐린 날을 맞이했고, 늦은 밤 시간대 우산 모양으로 그려진 비 예보 외엔 계속 흐릴 거라 다행이었다. 태양 없이 흐린 날이 오히려 시원하게 라이딩할 수 있으니 더 좋았는지 성희는 빠르게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실내 라이딩 위주로 운동하다 보니 한 달 만에 나선 길 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주 보는 동네 팀 클럽 저지도 만났고, 코스 중간중간 편의점에 삼삼오오 모여 자전거를 거치대에 세우고 함께 앉아 음료수를 마시는 이들도 보였 다. 실내보다는 확 트인 느낌이고, 가슴속 깊이 깨끗한 공 기를 불어넣으며 달릴 수 있어 좋았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보이는 탄천로의 산들거리는 풀들이 반가웠다. 둔탁한 실내 롤 장비의 소리와 달리, 깨끗한 자전거 도로 위에 사뿐하게 넘듯 굴러가는 휠 소리도 경쾌하게 들렸다. 역시 이런 점이 실외 스포츠 라이딩의 즐거움이리라. 기다렸던 비 없는 날이니 다른 때보다 업힐도 많이 타고 싶은 욕심이 생겨 경기 광주까지 달려 돌아오는 코스를 탔다. 업힐 도, 평지도, 다운힐도 오랜만의 상쾌한 라이딩이다.


하지만 상쾌함도 잠시. 오전 11시가 다 될 무렵, 갈마치 고개 터널을 지나 분당으로 들어설 때부터였던가, 갑자기 빗방울이 글라스에 부딪쳤다. 점차 중턱으로 내리막을 달리려는데 굵은 비로 바뀐다. 80여 km를 달려온 터라 온몸은 열과 땀으로 가득한 상태여서 춥지 않았지만, 익숙한 비도 경험상 달갑지는 않다. 타이어 장폭이 얇은 로드 사이클은 빗물에 미끄러지기 쉽고, 빗물 위의 브레이킹이나 회전 주행은 꽤 신경 써서 조향해야 한다. 빗방울이 아스팔트에 떨어진 뒤 튀어 오른 물은 흙과 함께 바퀴 휠 브레이킹 라인을 지저분하게 만든다. 단순히 지저분해진 건물과 물걸레 청소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지만, 카본으로 만들어진 휠에 브레이크 패드가 흙먼지와 함께 어우러지는 게 문제였다. 브레이킹마다 함께 스크래치를 내는 소리가 영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휠 안정성에 영향을 주는 열 변형에도 큰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카본으로 된 휠로 달리는 로드 사이클의 경우엔 비 오는 시간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무엇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는 오늘 성희는 흰색 저지와 빕을 입었다는 것이다. 작은 먼지도 금세 때가 탈 수 있어, 라이더들에게 매우 용감한 운동복 색상이라 여겨진 다.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을 살리려 입고 나온 흰색 저지와 빕에 비는 그야말로 쥐약이다. 비는 떨어지고, 떨어진 비는 아스팔트 위에 흙탕물을 만들고, 흙탕물은 앞으로 회전하는 타이어를 타고 점프를 한다. 그리고 그 작고 빠른 점프는 다리 벌려 웃긴 자세의 싱크로나이즈드 잠수처럼 두세 줄의 라인 궤적을 그린다. 하의 빕 엉덩이 중앙을 시작으로 등의 뒷목 바로 아래까지. 극명한 여러 줄의 흙탕물 자국을 남긴다.


갈마치고개 다운힐을 마치고, 탄천로를 따라 만남의 교회를 지나 분당으로 들어오는 구간. 굵은 빗방울은 이미 바닥을 다 적셨다.


— 젠장맞을. 또 빗나간 예보였던 건가?


어디 피할 곳도 없으니 커브 구간에선 속도를 최대한 내지 않고 자연 감소되도록 조향 해서, 브레이킹을 피하는 것이 상책. 하지만 튀어 올라 점프하는 연속 구간 흙탕물은 어쩔 수 없었다. 수 킬로를 남겨 두고부터는 흰색 저지고 빕이고 모두 포기. 비가 내렸던 사이 흐린 날의 흙탕 잔여 물이 있을 거라 예상해서 미리 끼워 둔 방수 슈커버 덕에 사이클 슈즈는 전혀 젖지 않고 깨끗한 상태였다.


— 이 몰골로 준석 씨를 본다면 정면으로만 만나야 하나?


운동으로 다져진 구릿빛 피부이지만 가녀린 몸매로 여성여성하게 다져 온 내 이미지. 준석 씨에게 이런 이미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배고픔도 잠시 참고 집으로 먼저 갈까? 하지만 집으로 가서 샤워를 먼저 하는 순간 침대로 빠져들 듯했다. 그럼 항상 준석 씨와 약 속했던 시간을 어기게 된다. 평일 저녁 만나고 싶어 갔던 때와 다르게 이 주말 약속을 어긴 적은 없다. 그래. 그래도 한 시즌을 다 보내는 지금까지 수십 차례 만나 온 사이인 데 이 몹쓸 흙탕물 한 번에 무너질 이미지가 아니지. 그렇게 무너질 조신함이었다면 그간 역동적인 운동 후 만나 오 지도 않았지. 조금씩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래! 결 심했어. 용감하게. 아일랜드 식탁 자리에 떡하니 앉아서, 준석 씨의 동선에 최대한 맞서 보는 거야. 그래 보는 거야.


드디어 도착. 비는 아직 멎지 않아서 후다닥 안장에서 내려 가게 입간판 옆에 거치해 두고 클릿 슈즈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조용한 걸음으로 들어간다. 드르륵. 한데 웬걸. 비가 와서인가. 테이블 위의 오간 손님의 자리 흔적은 보이지만 손님이 없다. 빈 가게에 나 홀로 들어선 듯하다. 조용하다. 안도하려는 짧은 순간. 적막을 깨듯 뒤통수에서 바로 들려온 소리.


— 성희 씨. 아니. 예쁜 옷이 왜 그렇게 됐어요?


— 아... 아... 아......, 안녕하세요.


— 아이고, 비를 쫄딱 맞으셨군요. 잠시만요.

— 가게가 비어 있어서 무슨 일인가 했어요.......


— 아, 수진 이모님이 친구분들과 함께 오셔서 배웅해 드 리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여기 수건 있어요. 이걸로 좀 닦 아요. 물기는 좀 닦을 수 있을 거예요.


최대한 준석 씨에게만은 이 등짝의 몰골을 보여 주고 싶 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결국 첫인사를 처참한 등으로 해 버리다니. 수건을 받아 저지와 다리로 흐르는 빗물을 닦으면 앉았다.


‘드르륵, 탁.’


— 어머나, 성희 씨라고 했나요? 또 보네요. 아니, 한데 쫄딱 젖었네요?


준석 씨에게는 첫 실패 후, 주방을 바라보고 마주 앉은 자세로 방어 중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이모님의 백어택. 게다가 ‘쫄딱’이라는 표현을 쓰시는 바람에 또 한 번 좌절.


— 아... 안녕하세요.


최대한 몸을 숙인 자세로 인사하며 집으로 먼저 가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빨리 분위기를 바꿔야 하는데.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솔직함과 개그로 풀어야 한다. 난 안 웃기지 만 그래, 용기는 이럴 때 부리는 거야.


— 사이클 복장이 비를 만나면 좀 우스운 모양이 돼요. 이럴 때 다들 이런 노래 부르죠. 산골짝의 다람쥐~ 아기 다람쥐~.


두 분 다 나를 바라보고는 눈만 동그라니. 순간 적막. 기 대했던 개그력은 1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한 건가.


— 아, 제 저지 뒤 등을 보시면 흙탕물이 튀어 있죠? 다 람쥐의 등처럼 여러 줄로요. 보통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이럴 때 다람쥐 되었다고 해요.


— 하하하하. 그렇군요. 다람쥐같이 귀엽네요. 아이고, 그나저나 춥지 않으려나 모르겠네요. 이 수건으로 바꾸어 어 깨 위에 걸쳐 봐요. 한데 항상 그런 복장이 예쁘긴 한데 불편하진 않수? 날씨에 그리 민감하다니 운동복이 그리 약 해서야....


— 아, 사이클 전용 복장이라 그래요.


— 아, 참. 지난번 성희 씨가 가르쳐 준 탄천에서 손짓 발짓 내 해 보고 그다음부턴 안심하고 소리도 지르고 건넌 다우. 복장도 사실 좀 궁금하긴 했고. 한데 비 맞으면 그 쫄쫄이 다람쥐가 된다니 참 재미있네.


— 가장 일반적인 스포츠 라이딩용 복장이에요. 비에 취약한 건 어쩔 수 없고요. 이따가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도 설명해 드릴게요.


추위보다 오히려 더 추운 개그력을 빨리 잊어야지. 큰 타월을 다시 받아 들어 걸치니 조금 덜 무안해진다. 오히 려 내게 귀엽다는 준석 씨를 다시 멀그러니 바라보는 수진 이모님의 시선. 조금 더 무안해진다....


준석 씨도 그 무안함을 느꼈는지 오늘은 무슨 음식인지 설명도 없이, 작은 항아리를 내어 준다. 방금 데워 두어 따듯할 거란다. 뚜껑을 열어 보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맑은 국물에 멸치와 버섯 향이 느껴진다. 수제비다. 비 오 는 날의 수제비. 왠지 잘 어울리고 운치 있다. 비 오는 날, 비에 젖은 저지, 찬 공기 가운데 안온한 느낌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찬 공기와 맞닿은 배에 싸한 느낌 들지 말라며 밀가루가 아니라 쌀로 빚은 반죽으로 만들었단다. 밀가루는 끊어지지 말라고 거들었을 뿐이라고.


— 우리도 방금 먹었던 참이라우. 국물이 괜찮아. 비가 스멀스멀 내리는 것이 딱 수제비 먹기 좋은 날이지. #수제 비와 라이딩 복장이라. 왠지 어울리지 않수? 그리고 이것 도 한번 먹어 보우. 내가 만들었다우.


준석 씨 손에 들렸던 종지를 빼앗아 내어 주신다. 열무김치다. 정갈한 국물, 약간은 쫀득한 식감의 수제비, 멸치로 우려낸 맑고 구수함에 상큼한 열무김치. 신의 한 수 조 합이다. 전혀 약속한 바 없는데 가져오셨단다. 수제비를 부 탁하셨고 동네 친구분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직접 담아 오 셨다고. 내가 올 시간임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듯 말씀하 신다.


— 우리 네 번째 만남인데, 지난번에 말은 놓기로 했으니 편하게 말할게요. 이제 여기 단골 되셨나 보네. 우리 준석이한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어 고맙수.


— 아, 제가요?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 이모. 무슨 말씀을. 손님이세요.


— 아, 술도 한잔 하는 사이는 아직 아니고? 뭐 대충 분 위기는 이미 서로 많이 대화를 나눈 거 같아 보이는데. 안 그런가? 성희 씨라고 했지? 좀 더 자주 와요. 자주 보고. 자주 봐야 정이 든다우.


— 아, 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다람쥐는 숲 속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려라. 이 길고 두터운 수건처럼 기억에서 덮어 버리자. 지금 이 느낌, 이 맛, 이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만 기억하자.


— 욘석아. 이제 아들이나 다름없는 놈이 뭔 말을 그렇게 덧대는지 모르겠네. 흐이구... 먼저 보낸 녀석과 너무 닮기 도 했고, 말투도 성격도 비슷해서 그저 내 핏줄이라... 아 들이라 생각하고 산다우.


— 아, 네. 그러셨군요. 지난번에 준석 셰프에게 제가 이모님 여쭈면서 듣긴 했어요. 무척 상심이 크셨겠어요.


— 그래요? 그런 이야기까지 나눴수? 뭐, 이미 내겐 오래전 일이라. 그나저나 그럼 둘이 이미 많은 이야길 나눈 거네요. 요 녀석이 가족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면. 말 나온 김에 이 녀석 이야길 좀 더 해 주자면, 참 야속한 녀석 이라우. 일본에서 돌아온다고 연락했길래 내 가게 자리를 봐 뒀으니 와서 열기만 하라고 했지. 그러곤 곧장 들어오 기로 한 녀석이 무슨 거지꼴을 해 가지곤 풀이 죽은 채로 공항에 나타났다우. 어찌나 놀랐는지 그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크게 다친 건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쉬고 싶다고만 하더라고. 그러곤 돌아와서 가게를 시작할 생각은 않고, 6개월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끙끙 앓기만 하더라고.


— 아, 이탈리아가 아니고 일본이었어요?


— 응. 그래요. 저 녀석 이탈리안지 뭔지에서 갑자기 일본으로 가 있다고 연락하더라고. 그러곤 꽤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들어와서는 그 꼴이었다오. 그 뒤로 어찌나 잠만 자는지 집 밖으론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지냈지 아마. 반년을 내리 그래. 어찌나 걱정스럽던지.


준석 씨는 그만하라고 손사래만 칠 뿐, 대화에 들지 못하고 주방에서 나와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다. 위생복이 밖으로 말린 팔뚝엔 그리 큰 상처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부산하게 움직이기만 하고 대화를 일부러 피하려는지 시선은 힐끗힐끗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본인의 이야기가 바로 옆에서 좀처럼 남다르게 회자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리라.


— 한데 그러고 나서. 지 방에서 6개월 만에 나와서 자다 일어난 떡진 머리를 하고 나와서는 첫마디가 뭐였는지 아우?


— 뭐라고 했는데요?

— 말 그대로 거지꼴을 해 가지고 나와서는 “엄마. 배. 고. 파. 요.” 했다우.


— 하하하. 엄청 배가 고팠나 보네요.


— 아이, 참. 이모님, 그만하세요.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 걸 뭐하러 하세요.


— 뭔 소리야. 아주 웃기고 재밌잖아. 성희 다람쥐 이야기만큼. 떡진 머리에 배고프다더니. 한데 어이없었지만 ‘엄마’라고 하는 표현이 허투루 나오진 않을 반가운 표현이라 생각했지. 내 마음이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져. 그래서 내 빨리 할 수 있는 장독대 된장 항아리를 가지고 찌개를 끓여 줬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지 뭐야.


— 이모님 된장은 정말 일품이에요. 시중에선 맛볼 수 없는 콩으로 빚은 메이드 인 코리아! 제대로 된 한국 된장이죠.


— 아, 이 수제비만큼 구수한 맛이 일품이겠는데요? 언제 기회 되면 꼭 해 주세요 그 된장찌개.


— 우리 준석이랑 뭐 애인 사이가 된다면 내 여러 번 만들어 줄 수 있지.


— 네?

— 이모!!!


—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다 이놈아. 알았다. 나 이제 예배 끝난 교회 정리하러 들어가 봐야 하니 먼저 일어날란다. 잘 들고 가우 성희 씨. 담에 우리 또 준석이랑 자주 봐요. 오늘도 예쁜 성희 씨.


— 고맙습니다.


일어서서 카디건을 걸치며 웃어 주셨다. 준석 씨는 얼른 가시라며 손으로 밀듯이 주방 밖으로 나와서 이모님을 배웅했다. 수제비는 그렇게 훈훈한 맛으로 마무리. 차를 한잔 하며 또 둘만 남았다. 처마에 뚝뚝 소리를 내는 빗방울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정리를 마친 준석 씨가 녹차를 한 잔 들고 주방에 살짝 비켜 앉았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이 싫은가 봐요. 왜 그리 비켜 앉아요. 난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은데, 준석 셰프님은 부담스러우신가 봐요?


— 아, 그래 보였어요. 오히려 불편하실까 봐. 버릇이에요.


— 그런데 이탈리아가 아니라 일본에서 다친 거였군요. 아. 불편하면 다른 이야기하고요.


— 아, 괜찮아요. 지난번에 뭐 이야기 나누는 바람에 이젠 성희 씨에겐 맘 편히 이야기할 수 있네요.


조금 더 가깝게 의자를 당겨 앉았다. 팔을 개어 잔을 내려놓고 준석 씨의 눈을 봤다. 조금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지난번처럼 손이나 눈동자가 떨리진 않았다. 내가 그만큼 가까워진 거라 생각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러리라는 마음가짐이었다. 당신에게 편한 사람이고 싶었다.


— 그 친구도 자전거를 이동수단으로 꽤 즐기는 편이었어요. 하루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한 손엔 가방을 움켜잡은 손으로 핸들을 함께 부여잡고 오길래 놀랐어요. 이탈리아는 중세 대리석재 외엔 대부분이 울퉁불퉁한 강돌로 된 길이라 자전거를 몰기 쉽지 않았는데 그 비 사이를 그렇게 오더라고요.


— 아, 네.


가만히 듣기만 해야겠다 싶었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불편한 기억에도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조용히 숨죽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듯 나지막이 짧게 대답했다.


— 그 친구 이야길 들어 보니 일본에선 어렸을 때부터 대부분 자전거를 많이 탄다네요. 아주 어린 초등학교 때부터 타기 시작해서, 익숙한 운전 능력을 키워 와서 크게 어렵지 않다나요. 일본 내에선 교통 환경이 녹록지 않으니 다들 자전거를 탄다고. 심지어 자전거 면허제까지 있다고요. 도심으로 나가는 자전거를 주차하려면 필요하다고요. 하루는 베로나 시내에서 조금만 나가면 있는 강가로 같이 데이트를 하면서, 그녀가 모는 자전거 뒷자리 거치대에 이 무거운 몸을 얹혀 앉았는데, 저를 태우고서도 자전거를 잘 몰아서 놀랄 정도였죠.


— 그 친구분도 자전거를 잘 타는 분이었네요.

그리고 길게 한숨이 이어졌다. 들이켠 녹차를 목 넘김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조용하고 긴 호흡이었다.


— 한데 그녀가 말도 없이 떠났어요. 한마디 언질도, 여운조차 없이. 일하던 카페 안 바 테이블 구석진 그 자리에. 어느 순간부터 나타나질 않더라고요. 어느 날 출근해 보니 그랬어요. 다음 날엔가 비번이었던 서빙 매니저가 저에게 주라 했다며 그 친구가 남겨 둔 편지 한 장이 다였죠.


준석 씨 시선은 문밖으로 떨어지는 빗물에 가 있었다. 넌지시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외로움이 느껴졌다. 실로 이유 없는 외면에 황망한 표정이었다. 애써 무심한 듯하려는 그의 음성에서 긴 여운이 느껴졌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꽤 얼마 전의 일이었던 것처럼. 상처였던 것처럼 보였다. 숨죽이고 듣고 공감해 주고 싶어졌다.


— 한참을 수소문했지만 연락할 수가 없었어요. 편지엔 연락처도 없었고. 휴대폰은 없는 번호로 끊어져 있는 상태였고요. 이름과 얼굴과 그 친구의 유학 시절 숙소만 알고 있을 뿐 그 외의 개인 정보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연락할 방법은 아예 끊겼고 숙소로 찾아갔을 땐 그녀는 이미 사라졌더군요. 숙소 주인도 급하게 처분하고 가 버려서 연락처나 행선지를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참 황당했죠. 그리 고....


이야길 이어 가려는 그의 긴 호흡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후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드르륵.’


— 어서 오세요....


손님 세 분이 들어와 테이블에 앉는다. 우리 이야길 방해하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며 자리에 앉았다. 준석 씨는 자리를 옮겨 주문을 받으러 나온다. 그와 나 사이에 가지는 오늘의 여유로운 시간은 여기서 종료. 더 이상 진중히 앉아 기다리기엔 어려워 보였다.


— 저. 괜찮으시면 집에 갔다가 이따 마무리하실 때 즈음 다시 와도 될까요?


주문을 받고 잠시 망설이던 준석 씨는 알았다며 내게 시선을 돌려 고개만 끄덕였다. 걸쳤던 수건을 살포시 내려놨다. 빠르게 밖으로 이동하는 내게 그는 애정하듯 말했다.


— 고마워요. 다시 와요. 이따 봐요. 기다릴게요.


— 네. 다시 올게요.


기다릴게요. “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기다릴게요.”라고. 그가 기다린다고 했다.



#셰프 로그 + 라이딩 일기: 수제비와 라이딩 복장의 대화록


오늘은 다찌에서 있었던 대화록 그대로를 일기로 남깁니다.


— 어제 오후엔가 비가 그치고, 왠지 저녁으로 가는 시간이었지 아마. 어제 해가 질 무렵 비가 그치고 하늘을 보니 맑게 갠 하늘이 아니라 요상~했다우. 촘촘히 늘어선 양털 구름이더라고. 내 살면서 배운 건데 양털 구름이 뜨면 바로 또 다음 날은 비가 올 참의 예고인 거지. 교회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때마침 한번 모이자며 비가 오면 수제비를 끓여 먹잖아. 굳이 우리끼리 힘들게 하지 말고 내 아들 가게로 모이자고 했지. 준석이가 바로 교회 앞에서 장사를 하는데 이런 때가 좋잖소. 수제비를 준비하면서 오전 11시까지 가겠다고 했더니 누가 오는 시간과 겹친다고 하더군. 겹치는 게 무슨 문제냐니까 운동하고 오는, 아끼는 친구라며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어야 한다나? 그래서 같은 음식을 하는데 밀가루만으로 하면 안 된다나? 그 누구가 누구일까 했수.


아가씨인가 했는데 내 예감이 딱 맞았지 뭐야. 사실 이 수제비는 간간이 내가 준석이를 위해 만드는 수제비라우. 어떻게 만드냐면 보통은 밀가루만으로 반죽을 만드는데, 찹쌀가루와 밀가루 중력분을 함께 믹서에 넣어 한 번 갈아 낸다우. 그럼 잘 섞이고 덩어리 지지 않는 반죽을 만들 수 있지. 아 하나 더. 덩어리 지지 않으려면 물을 조금씩 넣고 밀면서 반죽을 해야 하고.


멸치를 망사에 넣어서 국물을 끓여 두고, 팔팔 우러나면 다진 마늘과 간장을 조금 넣고, 감자와 채 썬 양파 그리고 애호박이나 당근도 넣고 끓이면 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죽해 둔 걸 손으로 밀며 찢어야 해요. 당겨 찢으면 으스러져 버리니까 덩어리가 찰지지 않아 식감이 떨어져.


조금 싱겁다 싶으면 마지막으로 소금으로 간하고 얇게 채 썬 파를 고명으로 올려 주면 되지. 여기에 마무리로 이 열무김치를 함께 먹으면 구수한 국물, 부드러운 수제비 그 리고 아삭한 열무김치가 아주 조화로운 맛을 내지.


한데, 그 얇은 운동복은 그래서 매번 그렇게 입어야 하 우?


— 아, 라이딩 복장이 좀 낯선 복장이라 부담스러우시죠? 라이딩 초보 시절 구매했던 동네 숍에서 싼값에 구매 가능 한 라이딩복의 경우, 한 해 시즌이 종료되면 입지 않기 일쑤였어요. 품질도 별로지만 안감도 별로이고 살을 조이는 부위의 피부에도 별로 좋지 않은 편이라, 그 뒤로 현우 오 빠 같은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좋은 브랜드의 옷을 오래 입자는 주의로 바뀌게 되었죠.


보통 상의 반팔 저지와 하의 빕을 한 세트로 구매하는데 싼 브랜드의 경우 10만 원대에서 비싼 브랜드는 50만 원을 넘는 경우도 있어요. 이 중 30만 원대 정도의 중저가를 선호하는데 이 정도 가격이면 어느 정도 품질 수준은 충족 하고 디자인도 좋은 편이에요. 소위 레슬링복처럼 생겼지만 일반 반바지와는 차원이 많이 달라요. 입고 라이딩 한 번 해 보면 다들 느끼는데요. 안장 앞뒤로 위치가 바뀌면서 바지가 흘러내려 라이딩 중에 귀찮게 다시 손잡이해야 하는 경우가 전혀 없어 편하거든요.


대부분 저지나 빕의 소재는 폴리에스터, 폴리우레탄의 조합과 간간이 이모님도 잘 아시는 나일론(주로 안감보다 는 바깥감)의 성분으로 만들어요.


— 괜찮아요. 이모님 설명해 드려도 쉽게 다 이해하세요. 얼마 전엔 교회에서 자매결연 맺은 운동부에 인사차 방문하셨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복장으로 이모님을 맞이했다고 하네요.


— 아, 그렇군요. 저 나름대로 라이딩복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는데요.

 

1. 통기성. 폴리에스터, 우레탄, 나일론 등의 합성 비율


에 따라서 달라질 텐데 우선 옷감을 만져 보고 들어 보면 이제 대충의 통기성 감이 와요. 너무 많은 에스터 비율을 사용해서 통기성보다 착용감만 살리는 것도 좋지 않은 데다가, 땀 배출 후 바로 말라야 하는 재질이 좋죠. 특히나 저처럼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일수록요.

2. 사실 바람 때문에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는 편이에요. 펄럭이는 옷을 입으면 그만큼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거든요. 그 차이가 생각보다 꽤 커서 이런 저지, 빕으로 구성된 라이딩 복장으로 갖추고 운동을 한답니다. 이모님 보시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사실 몸에 착 달라붙어야 해요. 바람과의 사투를 벌이려면 당연해요. 그래서 품이 하나 더 큰 사이즈를 선택하면 또 곤란하고요. 바람과의 사투 중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30 이상의 속도를 내기엔 너무 힘들 거든요.


3. 디자인이 매우 중요해요. 이모님께서 이제 탄천 자전 거 도로 건너실 땐 소리를 내시거나 손을 드시는 것처럼, 반대로 라이딩하는 사람도 눈에 잘 띄어야 해요. 멀리서도 가시성 있게 보여야 하죠. 자전거, 사람, 차 모두가 딱 보 면 눈에 띌 정도로요. 그래서 디자인도 강렬한 색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죠. 사실 안전을 위해서예요.


4. 마감. 저지의 팔과 상체 허리 끝의 마감이 중요해요. 빕숏의 밴드와 허벅지 마감 끝단의 소재가 매우 중요하죠. 허리 부분과 팔 부분 그리고 허벅지 마무리감은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로우 에지 혹은 실리콘으로 처리되죠. 실 리콘을 너무 많이 쓰면 피부 자극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폭이 넓은 것보다는 얇은 게 좋고요.


마감이나, 디자인이나, 재질이나 이모님이 설명해 주신 수제비처럼 찰지고, 쫀득해야 하고, 열무김치가 도와주듯이 디자인도 강렬해야 하죠.


— 어쩜 설명도 이리 잘하는지. 이거 내가 수제비 준비하길 정말 잘한 듯하군요. 우리 교회와 자매결연 맺은 그 학교도 운동부가 있는데 자전거를 타는 것 같았수. 내 나중에 학교에 운동복도 한번 선물하려 하는데 그때 도와주겠어요?


— 물론이죠, 이모님. 좋은 일에 불러 주시면 저도 달려가겠습니다.


— 그래요. 도와주는 김에 하나 더. 내 아들 준석이 좀 어떻게 구제해 준다면 내 더 바랄 게 없겠수.


— 이... 이모님. 그러시면 성희 씨가 많이 부담스러워해요.


— 이 녀석아. 이제 너 장가가서 손주 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좀 생각 좀 해.




사랑


성희 씨는 다시 온다고 했다.


베로나에서 그녀가 내게 남긴 편지에도 단 한마디, 다시 온다고 써 있었다면 그리 힘들지 않았으리라. 아니, 그래도 기약이 남았으니 기다리며 행복했으리라. 그녀와 한 달 가 까이 지내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때나, 그녀가 사업장으로 들어와 식사 중 나누었던 대화에서도 빠지지 않는 멘 트였다.


— 내일 다시 봐요.


항상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건 내겐 큰 행 복이었고, 이것이 사랑인가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휴일은 좀 긴 데이트를 즐겼다. 아침 일찍 만나 아디제강의 피에트라 다리를 건너기까지 함께 걸었다. 그 긴 거리가 힘들지도 않은 듯 함께 어깨를 맞대고 그녀는 내게 기대어 걸었다. 오후엔 가르다호까지 건너가 하루 종일 호수 주변을 돌았다. 그녀와 자전거를 타다 호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음색은 마치 어머니 같았다. 느리지만 명료했고, 부드럽지만 흥미로웠다. 내 이야기를 들을 때 그녀의 표정은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시간이 행복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이 야속할 뿐이었다. 다음 날 출근은 베로나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끊어 놓는 듯한 고통이었지만, 이내 점심시간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행복에 안도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깊고 크게 사랑하고 있는 듯했다.


보르고 누오보 중심지에 있는 그녀의 집에 바래다준 날 밤이었다. 4층 아파트의 3층에 자리 잡은 그녀의 숙소는 시내라 백색 등이 환하게 골목 입구를 비추고 있었다. 서로 내일 보자며 인사를 나누고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조명등 아래에서도 하얀 그녀의 손을 나도 모르게 덥석 잡아 버렸다. 그녀의 집 현관에서 내가 이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 놀라움을 빠르게 잊으라는 듯 그녀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 들어와요. 좀 있다가 가요.


현관 안으로 나를 이끌려는 그녀에게 또 한 번 놀랐다.

그녀의 손 역시 떨고 있었다. 그녀도 나도 처음 같았다.


그러곤 그녀는 내 뒤를 응시했다. 내가 잠시 의아해하자 신경 쓰지 말라 했다. 골목 뒤안길 쪽, 승용차가 서고, 문을 닫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눈엔 그녀만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밤만큼은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녀도 그러마 했다.


그녀의 숙소는 말 그대로 책, 침대, 의자, 화장실, 그리 고 작은 탁자와 부엌이 다였다. 부엌이라고 해 봤자 사람이 한 명 서면 비좁은 공간이었고, 식탁 겸 탁자가 다인 듯했다. 음식을 해 먹은 듯한 자리는 없었다. 깨끗이 비운 집같이 청결했다. 잠시 앉으라는 말에 탁자로 앉았다. 협탁만큼 좁은 공간. 순간 정적이 흘렀고 그녀는 내게 주스 한 잔을 건넸다. 그러곤 이내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을까.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이 심장 박동이 날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그녀는 지금 내 앞이나 옆이 아니라 화장실에 있을 뿐인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그 순간 화장실에서 그녀가 나왔다. 눈을 의심할 만큼 하늘하늘한 소재의 옷으로 바꿔 입었고, 그녀는 살짝 웃더니 내게 다가와 앉아 있는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가슴에 안긴 내 볼에 느껴지는 촉감. 어머니 같았다. 몇 년간 얼굴도 뵙지 못한 따스 한 어머니 마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침대에서 우리는 첫사랑을 나누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고, 낮에 가르다호를 거닐며 느꼈던 그녀의 시원한 피부 촉감과는 또 달랐다. 그녀는 무척 따스했다. 그녀에게 갈수록 그녀는 나를 이끌었다. 그녀의 사랑은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따스함이었다. 마치 온전히 자신을 그대로 느끼라는 듯이. 그녀는 허리를 지탱하며 나를 안아 주었다. 어느새 그녀와 나의 품 사이 온도는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새벽녘 건물 바깥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빗소리는 우리 사랑을 더 격정적으로 도울뿐. 그리고 함께 잠든 우릴 깨우지 못했다.


차량의 큰 경적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떠 보니 꿈이 아니다. 다행히 그녀의 침대였다. 함께 누워 있던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다. 잠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했다. 잠자는 내 모습이 귀여워 한참을 보았다 했다. 다시 눈을 마 주 보고 있다 미소를 띠고 일어나, 그제야 무슨 일인가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내 나는 시간이 새벽 5시임을 확인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다시 침대로 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아침 장사 준비를 위해 새벽 베로나 시장을 가야 한 다고 이야기하고 일어섰다. 우린 다시 포옹을 했고, 나는 손을 좀 더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가 되었고, 앞으로도 사랑할 사이이며, 그 사랑은 그녀와 나만의 소중한 것이라고. 서로 믿고 이야기하는 관 계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다고. 당신을 만났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어 눌한 설명에 아무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녀의 볼에 입 맞춤하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바로 몇 시간 뒤 그녀가 점심을 먹기 위해 내가 일하는 가게로 올 것이고 난 어제보다 더 뜨겁게 그녀에게 입맞춤하며 내가 만든 점심을 그녀에게 선사하리라. 그녀에게 우산을 받아 들고 나는 다시 누오보 거리를 지나 아디제강을 건너왔다. 걸어오면서도 내리는 빗소리에,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 은은한 향기가 없어질까 오히려 아쉬워 우산을 움켜쥐고 걸었다.


‘드르륵....’


— 어, 너 왔냐. 웬일이야....


— 뭐 하냐, 혼자 앉아서. 웬 청승인가 했다.


— 어? 아... 보고 있었어?


— 불 다 꺼져 있는데 제일 안쪽 미등만 켜 둔 채로 미친놈마냥.


— 아. 그랬구나. 그냥 들어오지 그랬어. 아 참, 이따가 성희 씨도 올 거다.


잠시 내 분위기를 살피던 현우는 한참을 밖에서 기다렸단다. 무심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길래 뭔 일 있나 싶어 한참 서 있다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는 걸 보고 들어왔단다. 내가 잠시 고쳐 앉을 때까지 넋 놓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시간과는 다르게 호흡하듯 보였나 보다. 시시하게 바라보던 녀석이 왜 내게 시간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밤에 성희 씨가 왜 오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다만 나도 혼자 보낸 시간이 있으니, 혼자 꾸는 상념도 있으리라. 현우도 이 해하는 듯했다.


성희는....


샤워를 하면서도 내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상처. 준석 씨의 눈동자.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 피곤함도 잊고, 다시 그의 가게로 향하고 싶었다. 잠시 함께 시간을 갖고,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다는 생 각뿐이었다. 항상 온화한 미소로 맞이해 주는 그가 상처가 있음을 알고 난 뒤로는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의 아픔을 잊게 해 주고 싶었다. 준석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어둑해진 밤, 탄천로 길을 나서서 멀리 보이는 가을 하늘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붉은색 행운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행선지로 빨리 오라는 신호인 듯 붉은색은 유난했다.


준석 씨 가게 앞. 현관 미닫이문 밖 안내등이나 실내등 이 모두 꺼져 있었다. 그가 혹 우리만의 대화를 더 이어 가기에 부담을 느꼈나 싶었다.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의자가 끌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니 주방 안쪽 다찌 끝에 이어진 아일랜드 식탁 뒤쪽, 테이블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현우 오빠와 앉아 있는 준석 씨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 오빠도 와 있었구나.


— 어. 그냥 지나는 길에 들렀어. 너 온다 하기에 둘이 짝짜꿍 하는 모습 꼴 보기 싫어서 안 가고 버티고 있었지.


— 후후. 계속 버텨.


— 자, 여기 소주나 한잔해.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미 둘 사이엔 소주 한 병이 비워져 있고 두 번째 병을 열고 있었다. 테이블엔 안주로 계란말이와, 방금 내었는지 김이 모락 피어오르는 오징어 숙회가 있었다. 술잔 하나 더해 함께 앉았다. 말없이 잔을 든 내게 현우 오빠가 먼저 한잔하라며 따랐다.


— 고맙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술은.


— 그래? 준석이랑 난 종종 이렇게 즐겼는데. 이 녀석 술을 그리 잘 마시진 못해서 주로 내가 다 먹지만.


— 학교 다닐 때 선배들이나 교수님 외, 사회생활에선 바빠서 관심 있는 사람 아니면 술잔 들 일이 별로 없었어요.


— 음. 그럼 우리도 그 선배님들이었으니 관심 축엔 들었겠구나. 오랜만에 이렇게 앉았는데 둘 사이엔 서로 알아서 나쁠 것 없으니 이상하게 보지 말고 성희 첫사랑 이야기나 해 봐라.


— 매우 이상한데요?


짓궂다. 술 한잔 받은 사람이고, 운동하다 와서 저녁 먹을 겸, 준석 씨와 이야기 더 하러 온 사람에게. 하지만 의 도가 뻔하다. 준석 씨에게 내 이야길 더 가까이 듣게끔 하려는 의도. 고마운 의도이긴 한데 너무 작위적으로 티를 내니 마음이 외려 막아선다. 다른 이야기로 돌려 한참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 다니면서 강의시간에 종종 땡땡이를 치고 당구장 차를 타며 겪었던 이야기들. 대리출석해 준다고 이런저런 성대모사했던 이야기들. 그러 다 교수에게 발각되어 함께 D를 받았던 웃지 못할 추억들.


준석 씨와 현우 오빠 둘은 학교도 같았지만 사회생활의 시작도 같았다. 도서관 사서 일을 함께하며 서가 넘버나 인 덱스 넘버와 달리, 관장을 괴롭혔던 이야기들. 한참을 듣기만 해도 좋은 시간이었다. 어느새 술을 반 병 가까이 혼자 마신 듯하니 취기가 살짝 올라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뱉어낸 내 이야기.


— 첫사랑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뭘 그리 감추고, 포장하고 그러나.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첫사랑이 에요. 마음 가는 대로 갔다가 돌아올 때 후회 안 할 수 없는 게! 그게! 첫사랑이니까.


— 얘 좀 봐. 지는 아까 하기 싫다더니. 어머, 이제 술술 뱉어. 그래 그래서 기억에 남는 첫사랑이 누구셨을까?


옆에 앉은 현우 오빠는 자꾸 내 팔을 툭툭 치며 성화였 다. 앞에 앉아 말이 없던 준석 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다 말했는데? 학교 다닐 때 선배들 중 한 명! 그리고 교수님 한 분! 사회생활엔 없었고.


— 그래? 누군데?


— 오빠들 예비역으로 학교 없을 때 다녀갔지롱~. 헤헤.


— 얘 좀 봐라. 난 신의 아들이라 예비역 아니었거든? 잠시 일탈하느라 휴학해서 2년 쉰 게 다고. 복학 시기는 비슷해서 예비역이어도 이름 말하면 대충 친구들 다 알거든. 학술회나 졸업생 모임에서 어느 정도들 몇 년 새는 알 고 있고.


— 모를걸. 이름 말해도. 사실 그리고 잊었어요. 아니 정확히는 까먹은 거지. 기억도 안 나.


— 아! 알았다 누군지!!! 혹시 걔 성이 짝가 아니냐? 맞지? 짝. 사. 랑.


— 에잇. 술이나 마셔요.


홍조 띤 나를 보고 둘은 한참을 웃었다. 박장대소. 현우 오빠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웃었고, 준석 씨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흐느끼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창피했지만 대담해졌다. 나도 모르게. 한순간 참았으니 이제 당신들 차례라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 난 반드시!!! 사랑을 만나면, 자전거를 가르쳐서 하트 코스를 돌 거야. 오빠들은 어딜 돌 거야?


— 야, 난 우리 아내랑 어딜 돌아. 집 안방이나 돌 거야.


— 아, 참 그렇지. 오빠는 유부지. 두부 같은 유부. 얼마나 담백하니 좋아.


— 자꾸 말이 짧아지는 게 얘 취한 거 같다, 그치 준석아?


준석 씨는 웃고만 있었다. 마침 내가 먼저 풀어놓았으니 이제 당신의 이야길 바랐다. 준석 씨 사랑 이야기나 더 해 보라고. 아까 하다가 만 그 이야기. 그 이야기 들으러 왔다고. 그리고 그 상처를 잊으라 때를 놓치지 않고 이야기했다. 다만 많이 아프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 야, 안 그래도 너 오기 전에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는 데. 그래 준석아. 우리 이렇게 웃고 잘 지내는 사이니까 이젠 쉽게 털어놔도 될 것 같다.


— 아냐. 아프지 않아. 하도 오래돼 놔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뿐이야.


그러곤 다시 술을 한 잔씩 돌렸고. 식어 버린 계란말이를 하나 들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웃다가 잠시 무표 정인 듯 멈칫하고 있으니 현우 오빠가 오징어를 입에 물며 잔소리를 더했다. 살짝 머물던 그가 오래 이야기할 것처럼, 의자를 고쳐 앉았다.


— 그래, 그럼 뭐. 오늘은 고백의 날인가 보군. 한데 둘에게 했던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그 뒤는 참 허무해.


— 원래 사랑은 허무한 거야. 날 봐. 짧게 사랑하고, 빠르게 가정 꾸려서, 짧은 머리하고 나온 녀석 업고 살잖아.


베로나에서 만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다시 정리한 후, 그는 그 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녀의 이름은 마사코. 마사코는 일본 여자였고 그녀는 매일 찾아와 주었고, 가까워진 둘은 한참을 서로에 대해 알고 가까워졌다고. 두어 달 넘게 함께 데이트하다 서로 사랑을 확인했고, 석 달 가까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고.


점심시간 테이블 서비스 매니저의 정리가 늦어 한참을 도와주고, 항상 그녀가 주문하던 파스타를 준비해 가져다 두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녀는 매니저에게 편지 한 장 만을 전해 달라며 주고는 사라졌다 한다. 그때부터였다고. 며칠을 그녀의 숙소, 그녀가 찾던 전공 책방, 도서관, 그녀와 걷던 거리를 돌며 그녀를 찾았다고.


— 도대체 편지엔 뭐라고 써 있었는데?

— 미안하다고. 당신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날 찾지 말라고.


그 말을 하는 준석 씨의 표정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임에도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뒤로 수소문했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고, 사라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했다.


— 난 버려졌음을 한참 뒤에나 깨달았지. 바보 같았어. 그리고 잊고 싶었어. 그래서 그 거리를, 그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지. 하루하루 걷는 게, 그녀와 함께했던 곳들을 다시 보는 게 괴로웠어. 다시 돌아온다면 모르겠지만 그 뒤로, 기다려도 그녀는 편지 한 장도 없었어.


그러곤 다음 달 즈음, 바로 로마로 이동했고 6개월을 더 일하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했다. 작은 골목길 안에 위치한 작은 식당. 하지만 로마의 그 유명하다는 성 베드로 광장, 왼쪽의 산카를로 궁전 바로 앞 골목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바쁜 일터였다고. 간간이 들어오는 아시아계 관광객 중 유독 일본인들이 많았고, 그들과 어느 정도 일본어로 오가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잊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들과의 대화에서 그녀 생각이 더 많이 났다고. 그러니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 사랑이라고.


— 하필 관광객처럼 만났고, 관광객들 때문에 잊지 못하 다니 참 괴로운 경험이네.


— 그래. 잊을 수 없었어. 그래서 더 찾아 나서 보기로 했지. 한데 그 용기를 행동으로 옮기게 해 준 건 바로 로 마의 식당 매니저였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 일본! 카레 덮밥 해 주실 때 이야기해 주셨던 그곳인가 보군요. 플래그십 매장.


— 그래요. 맞아요. 내가 관광객들과 일본어를 하는 걸 보고, 도쿄에 매장을 내고 무슨 스태그 몰을 낸다고 내게 의뢰를 하더라고. 사실 도쿄에 도착하고 자리를 잡자마자 일하면서 틈틈이 그녀를 찾아 나섰어요. 도쿄 시부야, 하라주쿠, 오모테산도까지. 그녀의 아버지가 하신다는 많은 대리점을 가진 자전거 브랜드 매장을 찾았죠.


— 야, 하필 왜 자전거 브랜드냐.

— 그러게 말이다. 나도 돌아오자마자 널 보고 아이러니했다. 왜 넌 또 자전거 장수냐고.


— 그래서 어딘지는 알아냈어?


— 응. 규모가 꽤 되고 도쿄, 오사카, 홋카이도까지 여러 매장을 가졌더군. 자전거로 지구를 구한다는 정신으로 일 한다는 회사가 어딜까 고민해서 찾게 되었지. 이스인지 뭔 지.


— 야. 너. 혹시. 지구를 구한다고? 혹시 Y’s Road 냐?


— 어, 맞다. 어찌... 알아?


— 얌마! 나 한참 ‘가자 gO!’ 만들 때 참고하고, 몇 가지 물건 좀 들여오느라. 출장 갈 때마다 들렀던 곳이야. 이런 이런! 거기 사장 딸이야?


모두가 놀랐다. 현우 오빠와 난 잘 아는 브랜드이고, 그는 몰랐다. 그는 사람을 찾으러 그 매장을 갔고 우린 자전 거나 자전거 부품을 찾기 위해 그곳을 찾아 알았던 것뿐이다. 100년 된 회사의 회장이라면 최소한 삼대에 물려준 장인 기업이고 그런 곳의 직계 딸. 그리고 그 직계 딸이 준석 씨의 그녀였다니.


— 그럼 결국 찾았겠네.


찾았다고 했다. 그것도 가장 넓은 도쿄 시부야점. 시부야 점의 점장을 설득해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지만 망설였다 했다. 다만, 단 몇 줄의 편지만 남기고 떠난 그녀를 그냥 무턱대고 찾아온 사람처럼 연락하고 싶진 않았다 했다. 또 그럼 부담스럽든가. 무슨 이유에선가 도망쳐 버릴 것 같았다고.


다시 우린 조용히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 이어, 준석은 마음의 상처를 더 여실하게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성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음을 깨달았다. 준석의 상처가 본인이 의도한 것과는 상관없었다는 것을, 예상보다 꽤 깊었고, 길었으며, 헤매었음을 알았으니. 자리를 마무리하고,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메시지 하나가 폰 화면에 떴다.


— 준석입니다. 이래도 저에게 다가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메시지는 쓰다 만 문장 같았다.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긴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에게 마음이 생겼고, 안쓰럽고, 함께 듣고, 마주 보고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메시지에 답장은 보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내일 상쾌한 아침, 명쾌한 메시지로 보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에게도 온전히 잊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거라 생각했다.



(11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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