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원 화백의 24회 개인전, “한국의 그림”
아리수 갤러리, 2025 3/11(화)~3/18(화)
“한국의 소나무 화가”로 알려진 김상원 화백의 24회 개인전이 인사동 아리수 갤러리에서 2025년 3월11일(화)부터 3월18일(화)까지 열렸다. 김 화백은 소나무를 그리기 위해 우리 산하(山河)의 어디든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화폭에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 개인전 역시 “한국의 그림”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소나무를 중심으로, 자연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한국의 그림”을 “한국을 그리다”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만치 김 화백은 한국적 정서와 정신을 담고자 한다. 특히 소나무를 집중해서 그리는 이유는 소나무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와 본질을 통찰하려는 것으로서, 자신이 터득한 기법과 터치touch를 통해 예술적 개성을 맘껏 드러내면서 소나무의 기품(氣品)과 멋을 화폭에 재현하려는 것일 것이다.
김 화백은 스스로 예고하기를 금년 6월경에 완성할 예정으로 현재 80%쯤 진행된, 판넬형 캔버스 24개를 결합한 대작(4.88m × 29.28m)과 더불어 판넬형 캔버스 81개를 결합한 초대형(7.32m × 65.88m)의 소나무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 하였다. 김 화백은 이처럼 예술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담대(膽大)함과 기백(氣魄)이 남다른 작가이면서 스스로 이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야심(野心)찬 작가라고 할 만하다.
이번 전시는 초대형 작품들에 비하면 소품(?)이라 할 만하지만, 그래도 100호 수준의 대작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고, 김 화백의 화풍이나 예술정신이 담겨있는 작품들이어서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기에 충분한 의미있는 전시라고 할 것이다.
“소나무 화가”로 알려진 김 화백답게 그의 소나무는 특별한 인상을 줄만치 작품에서 뿐 아니라, 작품 속 소나무로부터 전해지는 기운과 영험(靈驗)함이 심상(尋常)치가 않다. 그의 소나무 작품들은 대부분 현장에 나가 완성한 것이라 하였다(물론 초대형 작품들은 현실적으론 곤란하므로 예외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화풍이 사실주의적이며 정교하게 그리는 편이기에, 대상과 마주하며 꽤 오랜 시간동안 그려야 하므로, 시간적 제약이나 현장 상황의 조건을 고려하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자기만의 기법과 방식이 터득되어 있을 것이다. 즉 작품의 완성에 충분하지 않을 현실적인 제약조건에서 채색하거나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작가가 발휘할 기교나 기법이 특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이런 추측 역시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홀할 수 없는 조건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 화백은 한국의 실경(實景)을 찾아가 현장 사생으로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 실경을 그리는 방식은 이렇게 현장에서 눈으로 보는 대상을 사생(寫生)으로 그리거나,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을 강조하며 그리는 방식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실경을 보고 기억에 담아둔 감동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을 과장하거나 변형하여 그리기도 한다. 우리의 문인산수화나 진경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김 화백의 풍경화들은 소나무, 꽃과 나무를 그릴 때 실경을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그리는 사실주의 표현기법이지만 그가 재현하는 그림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된 감명과 정서를 최대한 담아내고자 하는 깊은 몰입상태 또한 유지하며 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 화백은 거의 현장에서 대상을 대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상황적 제약이 따르게 되지만, 김 화백에게는 현장에서 실재(實在)의 대상과 마주 하며 그리는 이유가 분명히 달리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그가 대상과 함께 하는 시간동안 느끼고 반응하는 정서는 단지 대상을 화폭에 재현하는 방식이나 과정에서의 만족으로 상쇄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대상과의 소통이나 교감 등으로 인하여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흥이나 정서에 대한 체험이 특별할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의 소나무는 멋스럽고 남다른 품격이 느껴진다. 예부터 소나무는 특별한 수종(樹種)에 속한다. 우선 4계절 내내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는 선비들의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한 겨울 추운 날씨가 된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는 공자(孔子)의 말을 통하여 소나무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의리를 상징하는 실체로 표현하면서, 바다건너 유배지로 자신을 찾아준 변치 않는 제자에 대한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주었다. 이때의 소나무는 지조와 신의를 상징하며 소나무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마음으로 부터 재해석하여 그렸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세한도」의 소나무에서는 엄정(嚴正)함이 느껴진다. 김상원 화백은 이런 소나무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현대미술의 아버지’,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Paul Sezanne)』도 말년에 「생트 빅투아르 산」을 연작으로 그리면서 투시원근법을 적용하며 “소나무”를 즐겨 그리기도 하였다. 폴 세잔의 “소나무”도 <세잔의 사과>만큼은 아니지만 주목 받는 그림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잔은, “회화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눈’과 ‘머리’인데, 눈으로는 자연을 바라보고 머리로는 표현수단의 기초가 되는 조직적인 감각논리를 생각해야 한다.” 라고 하면서 현장에서 눈으로 본 대상을 머리로 재해석하여 화폭에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런 태도로 볼 때 ‘세잔Sezanne’ 역시 서양의 화가였지만, 동양의 문인산수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김상원 화백의 소나무 작품에서는 이와 같은 문인산수화의 정신을 읽을 수 있으며, 나아가 <폴 세잔>에게서 조차 동일한 분위기를 연상해 볼 수 있으므로 “소나무”라는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격세지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동질의 정신적 사유를 확인할 수 있으니 소나무를 통해 이러한 다각적인 의미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반가울 따름이다.
따라서 김 화백의 작품들이 서양화로 그려졌지만, 예전 문인산수화에서 소나무가 상징하는 정신과 이상을 담고자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그의 작품들이 느낌을 강조하며 마음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한 문인화풍이라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사생(寫生)한 진경산수화풍이라 하더라도, 소나무의 높은 절개와 불굴의 강인함을 상징하고 있고, 한국의 특별한 장소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찾아다니며 소나무와 그 장소에 대한 유의미성과 감성을 진정성있게 표현하기 위해 깊이 몰입하는 한편, 자신의 내밀한 정서를 최대화하려는 생각으로 현장에서 직접 대면하며 그리고자 고집하는 것으로 추측해 본다.
김 화백의 「금강송설경(金剛松雪景)」은 설악산을 배경에 두고 흰 눈을 듬뿍 안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소나무를 그리고 있다. 눈의 무게를 견디다 보면 부러질 수도 있을 터, 그러나 굽히지 않는 노송(老松)의 당당함을 보여준다. 김 화백은 곧게 뻗어 잘 자란 소나무를 그리기도 하지만, 온갖 풍상(風霜)을 겪고 살아남은 소나무를 그린 그림도 많다. 가지가 잘리고 부러지니 잎이 자랄 수 없어 허옇게 맨살이 드러나기도 하고, 몸체가 기울고 휘어져 심하게 굽은 노송들은 바라만 보아도 그의 지난 역사가 눈물겹고, 살아남아 스스로 위대함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김화백은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 소나무를 만나고 이를 그려낸다. 현장에서 그리니 하염없이 시간을 들일 수도 없을 터, 자신 만의 기법으로 비교적 신속하게 그리고자 할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그의 작품에서는 빠르고 힘이 느껴진다. 다소 거칠기도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절제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감성을 최대한 끌어내어 부드러움을 얹혀 한 땀 한 땀 채색을 한다. 마음은 다소 서두를지는 모르나 최대한 자신과의 조율을 통해 적절한 타협의 방식으로 비교적 큰 작품들을 완성해 내는데, 그의 이런 화법(畵法)은 ‘점묘법(點描法)’에 가까운 방식이다. 이는 한국화에서 보여 지는 “미법(米法)”, 또는 “미점(米點)”에 해당하는데, “붓끝을 옆으로 눕혀 툭툭 점을 찍는 방식”으로, 수(數)도 없는 작은 미점(米點)들을 찍어 소나무의 잎을 묘사하고, 기타 배경이나 여러 대상을 채색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그는 깊고 순간적인 안목으로 대상을 포착하고 이해하며 이런 방식으로 그려 화폭에 재현해 내고자 한다. 결국 자기만의 기법을 사용하되 빠르고 힘 있는 그림의 분위기를 개성있게 살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나무를 대하는 그의 자세와 태도 또한 진지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소나무에 대한 외경심과 경건함을 숨기지 않는다. 숱한 자연 속 대상에서 소나무를 하나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정신과 깊은 내면의 의식을 쏟아 붙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상을 대하니 그림들은 강렬하고 장엄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나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웅대함과 마음속으로부터 힘의 요동이 일어나게 된다.
한편으론 김화백의 작품에는 강약(强弱)의 절묘한 배합이 섞여있다. 역학(力學)관계를 고려하여 구성하되, 주된 시각적 메시지를 위한 부드럽고 은근한 코러스chorus가 보완적으로 함께 한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하지가 않다. 강렬하되 숱한 부수적 요소들이 담겨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며, 오래 들여다보면서 그것들을 잔잔히 느끼며 한 걸음 더 작품 안으로 진입하도록 이끌리게 됨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작품을 대할 때 집중력을 발휘하고 속도를 높이면서도 조형단위로서의 “점(點)”을 통하여 스스로 전달하려 한 내적인 심상의 표식signal들을 그려 넣는 것을 잊지 않고 있기에 그의 작품 안에서 발견되는 유적(遺跡)들이 다양한 시각적 은유와 의식으로서 의미 있게 존재하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그 숱한 점들 역시 작가가 남긴 소통의 흔적이거나 대상에 대한 예의이며 반응이라 할 것이다.
김 화백의 소나무가 장엄하고 품격있게 존재하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꽃을 그린 정물화 같은 풍경화는 “꽃”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정직한 탐구자의 결과물과도 같다. 야생(野生)의 생명들이 자유롭고 거침없이 자라나는 原始(원시)에서 그는 본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인공이거나 의도를 배제하고 들판이나 원생(原生)의 터전에서 마구 자라나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이라 할 들판의 화초(花草)를 주목하는 김 화백의 내재된 미의식은 거친 대자연에서 세월과 자연의 도전으로부터 맞서고 견뎌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시선(視線)이라 할 것이다. 인간이 키우고 정리하는 화초(花草)라 할지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김 화백의 자연관과 미학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다. 소나무를 대할 때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는 달리 섬세하고 여린 감성으로 대하는 그의 또 다른 내적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꽃 그림이다. 그리고 활짝 개화한 산수유나무와 오래된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one shot으로 그린 작품들은 계절의 정취에 취하면 어느 것 하나 선택하여 주목하기가 어려울 텐데, 매우 절제하면서 안정된 심적 반응을 통하여 부드럽지만 시선을 강탈할 만한 블락버스터blockbuster급 감성을 전달해 주고 있다 할 수 있다.
김 화백의 화풍은 자기만의 스타일이나 분위기를 통합하여 고유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한편 해안가의 절벽이나 솟을 바위들을 그린 작품에서는 한국화의 부벽준법(斧劈皴法)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으며, 소나무 작품들에서도 진먹(진묵眞墨)으로 채색을 한 듯한 색칠과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는데, 결국은 한국화의 전통적 방식을 연상시키면서도 서양화의 강력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살려내면서 한국화의 방식을 이용한 듯하지만, 현대적인 감각이나 미의식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김상원 화백의 이번 전시는 설악산이나 강릉 주문진 영덕 등 유명한 소나무 군락지를 찾아다니며 그린 소나무 작품들을 포함하여 화초를 마치 야생의 꽃을 대하듯 자연 그대로의 미의식을 탐구하려는 의도로 그린 꽃 그림과 산수유, 감나무, 해바라기 등 자연의 대상들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정신적 사유를 담고자 하였다.
그의 그림에는 4계절을 한 결 같이 타협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고 당당히 외압(?)과 마주하는 소나무의 세월과 엄연(儼然)한 의기(意氣)가 담겨있다. 스스로 견디고 극복하면서 지켜내 오늘에 이른다. 이런 소나무의 강인하고 지조 있는 본질과 정신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 주는 교훈적 메시지도 우리는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은 고결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이를 따르고 새겨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온갖 세파에 맞서다 보면 상처도 입고 그로 인해 온전히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견디어 내고 살아남되 스스로 당당한 존재로 자기의 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이런 기대와 염원을 김 화백은 한국의 자연에서 찾고자 하면서, 특히 소나무의 정신과 의기를 주목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찬미와 외경의 마음을 담아 널리 자신의 뜻을 전하려는 중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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