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똘짱 Feb 26. 2020

나도 엄마가 있다 - 제자를 보내며

열여덟 번째 고자질

엄마. 이 일도 오래 하니까 남는 게 있네. 뭐 전리품처럼 아이들 이름이 하나씩 기억에 남어. 어버이날이 지나면 선생님의 기다림이 시작돼. 시골에 홀로 계신 할머니 마냥 말이야. 그날도 ㅇㅇ가 기억나냐는 연락이 왔어. 


오월은 참 바빠. 가정의 달이라 어버이날 어린이날도 있고 엄마 생일에 아빠 생일도 있지. 그 가운데 스승의 날도 있어. 졸업한 아이들 입장에서는 수시가 시작되나 봐. 벌써부터 진로가 결정된 아이들의 연락을 종종 받고는 해. 전혀 예상치 못한 적성을 찾은 아이들도 있지만 여전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야. 그래도 좋은 소식 건너 건너라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뿌듯해. 

 

그 날은 친구들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 아홉 시 넘어까지 시답잖은 이야기에 열을 내고 있었어. 주로 학교 이야기야. 사는 건 다 비슷비슷하나 봐. 입에 단내가 날 때쯤 탁자가 두어 번 울렸어. “선생님 00입니다. 혹시 00가 기억나세요?” 수년 전 제자의 연락이었어. 워낙 착하고 운동 잘하고 이뻤던 아이라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었지. 


행실도 아주 듬직했거든. 당연히 뭐 운동 쪽으로 진로가 잡혔나 기대했어. 대수롭지 않아 반가운 문자를 보낸 내게 돌아온 답장은 예상외였어.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 00의 소식은 다름 아닌 부고 소식이었어. 맞아 내 아이가 나보다 먼저 떠나버린 거야. 잠시 멍해진 정신은 친구의 호기심으로 다시 돌아왔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장례식도 하지 않았나 봐. 왜 그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알 수도 없었어. 그저 내가 전해 들은 것은 장지뿐이었어. 다음 날 공원묘지로 간다는 거,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는 거, 그리고 묘비 번호였어. 


사실 졸업 후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 중학교 간 이후로 따로 만나거나 연락한 적도 없었어. 한 살 아래 동생의 졸업식 때 마주쳐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어.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었어. 안타깝고 속상한 데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제 고3이 된 아이일 뿐인데 무엇이 그렇게 아이를 힘들게 했을까. 그리고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내가 손 내밀어주지 못한 자책감이 들었어. 내가 조금 더 관심 갖고 살가웠더라면 힘이 들 때 한 번쯤 연락하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징징거리고 투덜 받아주고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


집에 돌아와 앨범을 열어봤어. 창고 깊숙이 처박혀 있던 학생 파일도 꺼내어 봤어. 수년 전이지만 생생히 떠올라. 우리 반에서 가장 약한 아이의 옆을 지켜줬던 아이. 직모 머리에 늘 젤을 바르던 멋쟁이 아이. 수학여행 때 정신없던 내 가방을 슬쩍 들어주던 아이. 그리고 아이가 학기초에 쓴 “저는 공부를 못해요 축구가 좋아요 같이 축구해줘요”라고 편지가 보였어. 그 해에 만든 동영상에도 그 해에 찍은 사진 어디에도 아이는 씩씩하게 웃고 있었어.


다음 날 학교에서 조금 일찍 조퇴를 하고 공원묘지로 갔어. 꽃 대신 마이쭈랑 막대사탕 하나를 챙겼어. 나에게는 13살 모습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것이 생각나서. 어떤 어려운 심부름도 마이쭈 하나에 웃으며 다 했던 아이니까. 


11 - 11 - 11. 11 구역(가), 11번째 줄, 11번째 묘비라는 뜻이야.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학번이 생길 나이었을 텐데. 아이에 묘비를 보자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졌어. 정말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이 나왔어. 절을 해야 하는 건지 하면 안 되는지 몰라 그냥 옆에 앉았어. 제자의 묘에 가는 일이 흔하진 않을 테니 물어볼 때도 없었어. 옆에 쉬시는 분들의 묘비 주변은 다 말라있는 데 아이의 것만 젖어있었어. 


아직 흙도 마르지 않은 곳에 내 눈물이 더 해졌어. 늦봄의 대낮인데도 묘비는 너무 차가웠어. 아이의 손도 이리도 차가웠을까 데워질 때까지 내 손으로 한없이 쓰다듬었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오는 먼지 한 톨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어. 문득 주변 묘비를 보니 다 할아버지 할머니더라. 내가 할 일이 생각났어. 나는 주변 묘비에 절을 올렸어. 잘 좀 부탁드린다고 심부름도 잘하고 인사도 잘하는 착한 아이라고 ㅇㅇ이 좀 잘 챙겨달라고 부탁드렸어. 하도 울어 머리가 어지러울 때쯤 저쪽에서 교복 입은 한 무리가 다가왔어. 고등학교 친구였나 봐. 나는 마주치지 않게 차로 돌아왔어.


저 멀리 그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어. 자식 그래도 잘 살았구나 이렇게 멀리까지 친구들이 와줘서. 너무나 고마워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어. 한참을 그곳을 보다 보니 문득 아이의 편지가 떠올랐어. 이 녀석 축구가 그리도 좋다더니 이렇게 넓은 잔디밭에 있구나. 다행이구나 싶었어. 


엄마. 나 이제부터라도 좋은 선생님 해보려고. 그래서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부모님도 싫고 친구도 싫을 때 행여 아무도 자기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나쁜 생각이 들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연락해볼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어볼까 해. 

10년이 넘게 선생님을 해도 아직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보려고.



이전 06화 나도 엄마가 있다 - 아기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