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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Sep 13. 2021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에게 갔었어> - 신경숙

신경숙 작가는 가족 간의 미묘하고 섬세한 관계를 표현해 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것 같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그랬지만 신간 <아버지에게 갔었어>에서 작가는 다양한 인물의 시선으로 아버지라는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났다.




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건강 문제로 어머니가 서울로 가시면서 시골에 혼자 남게 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주인공이 J시로 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이야기의 흐름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임에도 마치 외과 의사의 직업병처럼 내가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은 위암을 진단받은 어머니 이야기다. 본인이 무엇 때문에 검사를 받는지도 모르고, 결국 암이 진단되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르며, 시골집으로 가고 싶어도 자식들이 못 가게 하여 집에도 가지 못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대장암 환자들을 주로 치료하다 보니 내 환자들의 상당수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본인이 암인지도 모르고 자식들 손에 이끌려 진료를 받으러 온다. 자식들은 행여나 암이라는 사실이 환자 귀에 들어갈까 싶어 어떻게든 숨기려고 온갖 노력을 한다. 보호자만 진료실에 먼저 들어와서 어머니(혹은 아버지)는 암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니 말씀 말아 달라고 사정하고, 환자 진찰이 끝나자마자 환자는 모시고 나가고 보호자만 진료실에 남아 치료와 관련하여 상담을 한다. 우리 병원 자체가 암환자를 주로 다루는 암센터인데 저렇게 한다고 본인이 모를 수 있을까 싶다가도 환자가 여든이 넘은 꼬부랑 노인일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사실대로 다 말하는 편이다. 물론 보호자의 요청을 무시하고 암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리지는 않는다. 다만 환자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의지를 가지고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환자의 회복에도 더 유리함을 설명하고, 가능하면 환자 본인에게 알리도록 보호자를 설득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환자의 나이보다는 전반적인 컨디션이다. 우리가 흔히 bed-ridden status라고 부르는 침대에 누워서만 지내는 노인이라든가, 치매로 정상적인 소통이 어려운 노인에게까지 굳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는 않는다. 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에서는 인물들의 나이가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지만 6.25 전쟁을 겪은 점으로 미루어 주인공의 어머니 아버지는 80대 중반 즈음일 것이다. 그 정도 나이라면 상황에 따라서는 암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치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역시나 환자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다. 내 짧지 않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여든이라고 다 같은 여든이 아니다. 단지 연세가 많으시다는 이유로 암이라는 사실을 숨긴다는 것은 설명을 충분히 듣고 치료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환자 스스로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는 일이 될 수 있다.




외과 전공의 1년차로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2009년 가을 어느 날. 


그날따라 유난히 아버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원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란 옆에 붙어 있을 때에도 서로 아무 말없이 티비만 보기 십상인데 하물며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아들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할 수가 없어서 나는 서울로 대학을 오며 집을 떠난 지 여덟 해가 지나도록 아버지께 전화를 드린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외과 전공의 1년차의 바쁨이란 상상을 초월해서 집에 전화할 시간에 잠이라도 한숨 더 자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집에서도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고 거의 연락을 끊고 살다시피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하필 그날따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건 토요일 오후였고 정말 오랜만에 집으로 퇴근하는 길이었고 기분 좋게 병원 문을 나섰는데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낙엽에 갑작스레 감상에 젖어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육 남매의 장남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중학생 때 일찍 여의고 방황을 거듭하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공채 시험을 봐서 합격한 곳이 전화국이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네 아버지가 원래 머리는 좋았다고, 공부도 곧잘 했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농땡이를 부렸다고, 고졸 백수건달을 어떻게 사람 만드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취직을 해야겠다고 공부를 시작하더니 전화국 공채 시험에 전체 2등으로 떡하니 붙었다고,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생각이 날 때마다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체신부 산하 전화국이 한국통신이라는 공기업으로, 또 한국통신이 민영화되면서 KT로 이름을 바꾼 이후까지 삼십 년간을 한 직장에서 근무하셨다. 한국통신이 민영화가 될 당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 신입생이었고 아버지의 직장이 민영화가 되었을 때 일어날 파장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단단한 뿌리 같은 존재였고, 그 뿌리가 흔들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민영화가 된 이후 아버지의 직장 생활은 크게 변했다. 옛날 공무원 시절부터 근무했던 나이 많은 직원들은 민간 대기업 입장에서는 큰 쓸모가 없었고, 회사는 이들에게 명예퇴직을 은근히 종용했다.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일은 공기업 시절 해 오던 일과는 달랐고, 종내에는 인터넷을 설치하러 다니는 기사 노릇까지 해야 했다. 인터넷 설치 기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근무하던 전문 분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외근직으로 내모는 것으로 압박하여 명퇴를 강요하는 회사의 태도가 괘씸했다는 것이다. '이래도 안 나갈래?'라는 무언의 시그널에 못 이겨 아버지 동료 분들이 대부분 퇴직하신 이후에도 아버지는 끝까지 회사에 남으셨다. 눈치 보면서 뭐 하러 회사에 붙어 있으시냐고, 이제 제가 모실테니 당장 때려치우고 나오시라고 내가 큰소리쳐온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나던 즈음이었다.


마치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몇 년 만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린 것이 하필 '그날'이었다. 핸드폰 너머 아버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아빠, 오늘 회사 그만뒀다."


잘하셨다고,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고, 푹 쉬시고 여행도 다니시고 취미생활도 하고 이제 그러고 사시라고, 전화기에 대고 떠드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버지는 조용히 듣고만 계시다가, 그래 니는 건강하제 몸 생각하면서 일해라, 힘없이 한 마디 겨우 내뱉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직장을 잃었다는 것이 한 가족의 가장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지를 짐작하기에는 스물일곱 아직 미혼이었던 나는 너무 어렸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나서야 새삼 느낀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세상 모든 아버지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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