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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ug 08. 2021

삶의 끝은 누구라도

<마당 씨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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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마지막 날. 안동 '구름에 리조트'에서의 하루는 기대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는데, 나나 아내나 둘 다 자연 속 한옥에서의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기에는 문명의 이기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TV가 없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그나마 와이파이라도 제공됨에 위안을 삼았던 우리는 대체 무슨 이유로 한옥 스테이를 했던 것일까.

그래도 '구름에 리조트'만의 품격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즐겨보고자 아침을 먹고 구름에 오프(Gurume Off) 북까페로 향했다. 고즈넉한 공간의 분위기가 손님들로 하여금 책을 집어 들고 읽는 척이라도 하도록 묘하게 이끄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그림책과 블록이 있는 반대편 건물에 밀어 넣고 아내와 둘이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저 아이들의 인내심이 최대 한 시간을 넘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잠깐 사이에 후다닥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했고 자연스레 만화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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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씨의 식탁>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가족이 함께 살면서도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는 집을 찾아 파주 시골로 이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었던 나는 <마당 씨의 식탁>이라는 제목과 다소 익살스런 표지(우리나비에서 출판된 초판)로 미루어 <리틀 포레스트>류의 귀농 스토리인가 지레짐작했는데 이야기는 점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가감 없이 그려낸다. 어머니의 건강 악화, 아버지에 대한 미움, 병원비를 대기 위해 사금융에까지 손을 대야 했던 신산한 현실.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아내와 아이로 대변되는 '지켜야 하는 세계'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도망쳐 나와 멀어지고픈 세계'간의 충돌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현실의 가족이란 절대 사랑으로 똘똘 뭉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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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는 순서가 없지만 치료에는 순서가 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통틀어 가장 와닿았던 문장이다. 응급실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혹은 자기 가족이 가장 급하다. 하지만 치료에는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선착순이 아니라, 위중한 순서다. 응급실에 도착한 순서는 그 다음이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환자들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목도하게 된다. 의사로서 내 역할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는 것뿐이다. 그 뒤에 놓여진 환자와 보호자 개개인의 사정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내가 기억하는 환자의 죽음은 환자가 어디가 아팠고 어떻게 치료했는데 어째서 환자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는지, 거기까지가 전부다.

 

가족들이 기억하는 환자의 죽음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환자의 죽음이 그들에게 어떤 상실감을 주는지이다. 작가는 좁은 부엌에서도 이 세상 가장 맛난 음식을 만들어내던 분으로 어머니를 추억한다.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 남편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결국 극복해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게 되고 작가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젖을 새도 없이 어머니의 치료비와 남은 아버지의 간병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유산은 작가의 몸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손맛, 바로 '마당 씨의 식탁'이다.


삶의 끝은 누구라도 안타깝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한 명 한 명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의사로서의 나는 그들의 속사정 하나하나를 모르기에 질병의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고, 환자의 가족들은 하나하나의 사연으로 환자를 기억하고 가슴에 담는다.



오랜만에 좋은 그래픽 노블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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