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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r 16. 2022

기나긴 이별 - 레이먼드 챈들러


1.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탐정이라 하면 셜록 홈즈와 포와로만 알고 있던 내게 필립 말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치 한 편의 누아르 영화를 보는 듯했다. 하드보일드 문학이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면 <기나긴 이별>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2.

예전에 Unknown people이라는 꽤나 인기 없던 힙합 그룹이 <필립 말로우의 잃어버린 소녀 Pt 1>이라는 곡을 낸 적이 있었다. 뮤직 비디오가 무슨 영상 관련 상도 받고 그랬었는데 곡도 괜찮고 뮤비는 끝내줬지만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었다. 책을 읽는 내내 뮤직비디오와 싸비 멜로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인기를 좀 더 얻어서 처음 계획대로 Part 3까지 나왔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https://www.youtube.com/watch?v=FS2dBfVjsmY


3.

"나는 낭만주의자예요, 버니. 밤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가죠. 이런 식으로 하면 땡전 한 푼 못 벌어요.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창문을 닫고 TV 소리를 더 높이겠죠. 아니면, 재빨리 속도를 내서 그 자리에서 멀리 떠나겠죠. 다른 사람들의 문제거리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상관해봤자 지저분해질 뿐이거든요. (중략) 그러니까 당신은 좋은 경찰이고 나는 사립탐정밖에 못 되는 거죠. 아일린 웨이드가 자기 남편을 걱정하길래, 나가서 그를 찾아내 집으로 데려왔죠. 또 한 번은 그 친구가 문제가 생겨서 내게 전화했길래, 달려가 그 친구를 잔디밭에서 날라다가 침대에 눕혀줬지만 그때도 땡전 한 푼 못 받았어요. 수임료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중에서


소설에서 필립 말로가 내뱉는 이와 같은 자조 섞인 한탄이야말로 주인공의 캐릭터를 가장 적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필립 말로는 스스로를 '낭만주의자'라 칭한다. 돈에는 관심이 없고, 비록 지저분하게 얽힐지라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낭만주의자.


낭만주의자라. 내가 언젠가 스스로를 이렇게 칭한 적이 있는데.


https://brunch.co.kr/@lsy9983/45


위 글은 의사 파업이 한창이던 때 울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글이다.


......나는 외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퇴근할까 말까 했던 1년차 전공의 시절에도, 수술에 논문에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전임의 시절에도, 밤새 응급수술을 하고 수술장 탈의실 침대에서 겨우 눈만 붙인 뒤 다음 날 하루 종일 외래 진료를 보는 일이 허다한 요즈음도, 나는 내가 외과 의사여서 정말 행복했다. 바이탈을 다룬다는 것, 환자의 생사 여부를 내 두 손으로 결정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가슴 뿌듯할 수가 없었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그 뿌듯함에 중독되어 나는 대학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비록 개원할 돈은 없었지만 페이닥터로만 취직해도 어디를 가든 대학에 남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금전적 대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내는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병원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세상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 수술장에서, 항상 웃고 다니는 우리 1년차 A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왜 외과를 선택했니?"

A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외과가 제일 재미있더라고요. 이거 아니고는 안될 거 같아서요."

우리나라 의료가 이만큼 유지될 수 있는 건, 이런 열혈 낭만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팍팍하기만 하다.

그것은 필립 말로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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