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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l 21. 2022

의과대학 공부는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만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정명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은 참 잘 써진 에세이집이다. 단단하게 다져진 필력을 바탕으로 검사라는 전문직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누구에게든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법조인과 의사는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타인들의 존경과 미움을 동시에 받는 전문직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공감 가는 부분이 참 많았다.




"어느 직업이나 그렇겠지만 검사도 한 가지 타입, 한 가지 성향만으로 이루어진 직업이 아니다. 결국엔 내 안에 있는 여러 다층적인 요소들 중에 이 일을 직업으로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부분을 기어이 발굴해내고, 거기에서 기쁨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결국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중에서


고등학교 때 내 꿈은 수학자였다. 수학을 제일 좋아했고, 과학고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큰 준비 없이 나갔던 대한수학올림피아드(KMO)에서 비록 장려상이긴 했지만 입상까지 한 것을 보면 실제로 잘하기도 했다. 3년 내내 장래희망란에 수학자라고 채워 넣었는데 결국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점수에 맞춰서'였다. 전국 최상위권이니 당연히 서울대 의대를 노릴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달까. 실은 수학을 좋아하고 잘한다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던, 혹은 그럴 시간조차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이라, 당연히 의대에 진학할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워낙 반복해서 듣다 보니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정말로 그게 내 길인 것만 같았다.


대학생이 되어 장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오히려 고민이 늘었다. 내가 의대에 온 것이 잘한 일일까.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했던 것은 수학인데, 스스로에 대한 고민 없이 시류에 편승한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자퇴하고 수학을 전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럴만한 용기는 없었고 어영부영 예과 2년이 지나갔다. '공부 좀 잘한다고 우르르 의대로 몰린 사람들은 전부 쓰레기'라며 술만 마시면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본과에 진입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의과대학 공부는 이루 말할 수없이 힘들었다. 숨이 막히는 양도 양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재미가 없었다. 의학은 1 더하기 1이 2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때로는 1이나 3이 될 가능성도 감별해야 하고 가끔은 엉뚱하게 5이나 10이 되는 예외적인 경우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학문이었고, 1 더하기 1이 반드시 2여야만 했던 나는 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본질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수업이 재미가 없었고 (통계학에 기반을 둔 예방의학이 유일하게 재미있었다) 강의실 맨 뒤에 앉아서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자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유급하기는 싫어서 꾸역꾸역 시험은 보았는데 매 수업마다 졸면서 우수한 성적을 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서 수업을 듣지 않고 강의록과 족보만으로 공부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만큼의 학점을 4년 내내 유지하다가 졸업했다.


일단 의사 면허를 따기는 했는데, 솔직히 너무나 불안했다. 겨우겨우 의사가 된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 그렇다고 의사가 적성에 맞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 잘할 수 있을까? 인턴 1년 해 보고 안되면 때려치우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3월 첫 턴으로 시작한 응급실 트라우마 인턴은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넘어져서 온 환자 엑스레이로 골절을 찾아내어 정형외과에 연락하고, 머리가 깨져서 온 환자 씨티 찍어서 경막외출혈을 찾아내어 신경외과 콜하고, 팔꿈치가 빠져서 온 아이들 곱게 집어넣어서 돌려보내고, 한 명 한 명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밤만 되면 여기저기 찢어져 내원하는 취객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꿰매어 퇴원시키는 것조차 신이 났다. 이후 1년 동안 돌았던 모든 과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다 재미있었다. 심지어 군대 같은 과 분위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정형외과도 수술 자체는 재미있었다.


그해 여름쯤 생각했던 것 같다.

아, 나는 바이탈 다루는 의사가 적성에 딱이구나.

의과대학 6년 내내 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했는데, 괜한 고민이었구나. 의대 오길 정말 잘했다.


"사람들은 어떤 직업군의 사람들이 대략 비슷한 유형의 성향을 가졌을 것이라고 쉽사리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검사처럼 좀 특이하고 대체로 미움받는 직업군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냉담하고 무심한 표정의 검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울보 검사도 있고, 소심한 검사도 있고, 수다쟁이 검사도 있다. 검사든 판사든 어떤 직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중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다들 비슷비슷할 것 같지만 내가 20년을 겪어 본 바로는 의과대학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개중에는 나처럼 바이탈을 다루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영상이나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할 것이며 어떤 이는 기초 의학을 전공하거나 의료 관련 스타트업을 차릴 수도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해서 어느 누구든지 본인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이 각자 적성에 맞는 길을 선택할 수만 있어도 우리나라 의료와 의학은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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