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석사 과정 1학기.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어학시험을 준비하는 어학원생이었을 때. 저의 가장 큰 꿈은 대학생, 정확히는 대학원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에게 이런 말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흔히 듣는 말이죠.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 이렇게 생각할 거야. 어학원생이었을 때가 제일 좋았다고 말이야. “
당시의 저는 이 말에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원생인데, 지금이 이렇게 힘든데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대학 생활이 시작되고 채 1학기도 끝나기 전. 저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탈출구를 알려주지 않는, 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그 탈출구를 찾는 것도, 그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도 너무나도 먼 여정이었습니다.
독일에 나온 지 1년 6개월.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대학원 석사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는 것부터도 멘붕이었지만 학교 수강신청 앱과 커리큘럼 확인 등을 거쳐 적당한 수업을 스캔 후 신청완료. 그렇게 수업에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나이는 있었지만 다시금 대학생활을 한다는 것에 나름의 낭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망은 로망, 낭만은 낭만,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일단 독일의 대학도 함께 하는 그런 끈끈함과 즐거움이 있는 학사와는 달리 석사는 소위 개인전이었습니다. Leibniz Uni에서 학사를 마무리하고 석사로 진학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다른 대학교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하러 넘어온 학생들도 있었기에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이지도 내성적이지도 않은 저에게 있어서도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고 어울린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필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기에, 수업이 끝나면 앞뒤좌우에 앉은 학생들 중 필기를 가장 많이 한 친구를 찾아서 내가 알아듣는 게 좀 어렵고 독일어가 서툴러서 완전히 받아 적지 못했다며, 필기한 것을 좀 사진 찍어도 되냐 물을 수 있는 뻔찌는 있었지만 더 친밀하게 다가가 밥을 같이 먹자고 제안하거나, 쉬는 시간에 스몰토크를 함께할 만큼 뻔찌가 있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독일어라는 큰 장벽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독일어라는 큰 장벽은 수업시간에도 이어졌습니다. 모든 교수님들이 동일하진 않았지만, 문장의 끝부분을 얼버무리는 발음을 하는 교수님부터, 탁성이 심한 교수님, 말이 너무 빠른 교수님 등 다양한 이유로 수업시간에 하는 말의 정말 반에 반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때까지도 제대로 버리지 못한 „척“의 굴레. 수업이 끝나면, 그리고 수업과 수업 사이에 공강 시간이 뜨면 굳이 어디 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아니, 공부하는 척을 했습니다. 필기를 새로 하고, 수업자료를 번역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면서도 꽤나 놀았습니다. 마음으로는 공부하고 있으니까라고 자위를 하면서 몸은 놀고 있었던 것이죠. 정말 멍청하게도 말이죠.
그리고 첫 학기에 신청한 수업 하나가 정말 최악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수업명. „Bioenergie“라는 수업이었습니다. 커리큘럼상 전공필수나 세부전공은 아니었고, 기타 전공과정에 속하는 수업으로 들어도 듣지 않아도 되는 선택과목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진 모르겠지만 이 수업이 끌렸고, (혹은 시간이 맞아떨어졌고) 수업에 참여를 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 수업은 따로 필기시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를 이루어서 발표를 하고 그 발표를 기반으로 말하기 시험을 이어서 문답형으로 진행하고 그에 따라 점수를 받는 수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누구에게도 조원으로 선택을 받지 못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헤매다 3인 1조의 그룹에 들어갔습니다. 4인 1조였지만 한 명이 수업을 포기하는 바람에 3명이 된 것이었죠.
지금은 정확히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중동 국가에서 온 친구 한 명과 남미 쪽에서 온 친구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보다 독일어 실력도 앞서 있었고, 수업에 대한 이해도 높았습니다. 그렇기에 조별 모임을 하고 과제를 진행해 나가고 발표를 함에 있어서 그들이 주도적이었죠. 그렇게 수동적이었던 학기가 지나가고, 마지막 최종 발표를 하고, 문답 시간을 가진 후 성적을 개인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 높은 점수는 아니었지만 그들 2명은 합격을 하였고, 저는 불합격을 하였습니다. 당시 교수님의 말로는 내 독일어 실력이 부족하여 제가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원인이 독일어 때문인지 아니면 수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전하면서요. 물론 그 평가를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2가지 이유가 모두 맞았거든요. 독일어 실력도 부족했고, 수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를 가장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그 2명의 친구들 중 남미에서 온 친구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수해야 할 수업이 몇 개 남지 않은 거의 마지막 학기 즈음이었고, 저는 첫 학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 상황을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저 스스로도 저 스스로를 질책하는 시기였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친구는 본인의 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원인이 함께 발표를 하고 조원으로 있었던 나의 책임도 있다고 보는 건지 점수를 받고 나오면서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이렇게 독일어도 못하고, 수업도 제대로 못 따라가면서 왜 독일에 공부하러 온 거야? 그냥 너네 나라로 돌아가.“
라고 말이죠. 정말 그 말을 듣는데 충격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속상했던 건, 그 말을 정확히 이해를 했지만 그 친구에게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는 엉망인 상태였으니까요. 몇 번을 그 장면을 돌이켜봐도 저는 정말 똥멍청이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당시에는 더욱 심각하게 저에게 다가왔고, 저를 끝의 끝까지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아직도 제 마음 한구석에 깊은 흉터처럼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꺼내줄 사람도 없는, 혼자서 벗어날 힘도, 방법도 없는 그런 상태로, 그 구렁텅이 속에서 말이죠. 저의 독일생활 가장 심각했던 시기, 자존감이 바닥의 바닥을 찍었던 시기의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