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가운데 성숙해지는 법
내가 알기에 사랑이야말로 깨어있음과 살아있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안전하게 열어주는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게 열린 문을, 사랑 때문에 겪는 고통이 계속 열려 있게 한다. 큰 사랑과 큰 고통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두 개의 문이다. 용감하게 그 문을 열어두기로 하자.
- 리처드 로어-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람과 부딪히면서 살아야 하므로 늘 마음이 부대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불합리한 일을 당하거나, 차별과 무시를 받고, 공평하지 않은 처우를 받을 때도 있고, 오해를 받거나 배신을 당할 때도 있다. 선의를 베풀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어 내가 피해를 보는 예도 있다. 그러면서 생겼던 것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경계를 분명히 하고, 똑똑해 보이고, 상처를 덜 받도록 나를 무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상처를 덜 받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하고 멋진 척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내면은 곪을 대로 골았고, 삶의 방향을 잃었으며, 두려움에 떨며 즐겁지 못한 하루를 보낸 것이 사실이었다.
행복 의자에 앉아 깊이 생각해 보니 나는 상처를 받지 않도록 부단히 나를 무장했지만, 상처를 받은 아픈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이 내면의 현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결국은 상처뿐인 영광일 뿐 공허함을 느껴졌다. 이제 마음을 좀 달리 바라보는 시기가 왔다. 남은 인생은 기존의 패턴과 방식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해야 했다. 인생이 고통스러운 것은 나만 힘들고 아픈 상처라 여겼지만, 수많은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해결책을 얻는 과정에서 너도, 세상도 함께 힘들었구나!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제 함께 힘든 세상에서 유일하게 벗어나는 길은, 내가 먼저 그 자리에서 좀 더 변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남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기약 없고, 눈치만 보다 늙어가면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크게 후회할 것 같기 때문이다. 더 큰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 내가 나서야 한다.
범죄자를 치료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자녀만 잘 보호하고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해야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범죄자를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채우는 것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늘 그들이 언제 안전한 공간을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 믿지 못하는 공간, 믿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서는 해결책이 없다. 늘 두려움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더 각박해지고,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줄며, 경쟁 속에서 늘 성공에 노심초사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먼저 개인이 먼저 경험하게 된다. 이는 환경이나 사회 문제도,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 사태에도 같은 메커니즘이다. 나 혼자만, 내 가족만 보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문화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작게는 내 안의 몸을 살펴보더라도, 내 안의 모든 장기와 세포들이 다 건강해야지 내가 건강한 것이지, 건강하지 못한 세포를 제거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나이가 들어 허리도 아프고, 전립선 쪽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집안 내력으로 혈압도 높다. 이는 내가 가진 선천적으로 취약한 부분이다. 그 부분에 대한 보완과 관리가 없어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그 부분을 혐오한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없는 척 살다 보면 더 큰 화를 겪게 될 것이다.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견뎌주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관리해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내 몸이 자연적으로 낫기를 바라며, 누군가 치료해 주기를 바란다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닌 이치이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심리적 고통도, 이와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심리적 고통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해 나갈 때, 그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알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적 고통은 융이 이야기 한 대로, 내 안의 콤플렉스, 특히 자아 콤플렉스가 자아가 Self인 양 행사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Ego를 제거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공생할 수 있는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취약성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고, 존중해 주려는 마음이 없을 때, 문제는 생긴다. 내 안의 상처 받은 감정도 억압하고 덮어두려고만 할 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알 수 없고,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회피하거나 이상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내 안의 싫어하는 나 자신의 모습, 내가 싫어하는 타인의 모습, 사회의 역겨운 현실도, 배척하지 않고, 내가 중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고,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 과정에 내가 몰랐던 내 안의 부정적인 콤플렉스도 자꾸 알아차리려 해 보아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견디어 보면서, 떨쳐낼 것은 떨쳐내 보내고, 감싸 안을 것은 포옹해 보아야 한다.
삶이란 껴안는 것이다. 사랑을 가지고 껴안을 것인가? 두려움으로 껴안을 것인지?이다. 껴안아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를 안았을 때와 같다. 때론 손을 잡고 유대감만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더 치열하게 안아보아야 한다. 체온과 체온을 느낄 때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동안 나는 나를 확 껴안아 줄 대상, 세상, 환경만을 바랬다. 운 좋게도 그런 분을 만난 적도 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늘 그런 대상만 바랄 뿐 나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다. 나를 껴안아 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껴안을 때 그 온기만큼 세상은 안정되고, 깨어날 수 있다.
물론, 역겨운 냄새를 내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씻고 변화를 기다리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나는 성범죄자를 치료하면서 연구하였는데, 그들도 사회적 손가락질을 받으며 지탄을 받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내면에는 자신을 수용해 주기를, 자신의 문제를 직면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개선 의지가 있는 사람은 변화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변화는 따뜻한 이해와 포옹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45 평생을 뒤돌아보니, 내가 이만큼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부족함을 주변 사람들이 메꾸어 주고, 도와주었던 사랑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내 안의 보이지 않은 무의식, 무언의 힘도 그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불편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 확언을 하며, 나와 세상을 껴안으려 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현재의 네가 아니라 과거 네가 살아온 습관과 패턴이다. 나도 너처럼 부족하고, 자신만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젠 나는 변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너의 모습을 껴안을 것이다. 네가 편안하기를 빈다. 너를 보는 내가 평화롭기를 빈다.”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너를 인정한다. (웃으며) 실수를 했구나. 너를 따뜻하게 안아본다. 과거의 못난 너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확장될 문제들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문제만 해결되기를 노력한다. 실수했지만 큰 탈 없이 네가 해낼 수 있는 것은 너 안의 큰 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너는 안다. 그 힘이 너를 안고 있고,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