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오래된 그래서 그리운

운현궁에서

by 삼도씨
[운현궁 2022]

문화센터를 다니던 때는 우리들은 주로 북촌이나 인사동에 가서 어반스케치를 했다.

매번 먹는 밥이 물릴 때 외식을 하듯, 일행 중 한 샘(수업시간에서 서로를 샘이라고 호칭했다)이 " 오늘은 북촌 말고 다른 데 없을까요?" 했다.

우리 중 종로구에서 나고 자란 우리의 보배인 샘이 " 그럼 운현궁으로 가볼까요"라고 했다.


운현궁이라는 순간 소설 <<운현궁의 봄>>이 생각났다.

내용은 전혀 생각 안 나고 제목만 생각났지만, 아무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간다는 것은 설레는 일.

그때까지 내 머릿속 내비게이션은 인사동과 북촌 쪽 길만 겨우 깔린 상태였다.

핸드폰이 생긴 뒤부터 가까운 친구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것처럼, 항상 길을 안내해주는 보배 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녀서 머릿속 내비게이션의 영역은 한정된 장소만 입력되었고, 새로운 길을 가면 버퍼링에 걸렸다.


운현궁 앞에 안내 글을 읽고, 처음 간 운현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궁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북촌을 다니다 보니 매번 그리는 풍경이 한옥이다.

물론 사람도, 타는 것들도, 어렵긴 하지만 한옥 기와는 그리기가 참 까다롭다.

한옥의 암기와와 숫기와가 있다. 육안으로 보기엔 암기와가 숫기와보다 더 넓어 보이지만, 사실 암기와랑 숫기와의 넓이는 같다. 그날도 나는 운현궁의 한옥과 아름드리나무를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리고, 모여서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닥에 그림들을 놓았다. 모두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었는데, 우리들의 보배인 샘의 그림은 반닫이 위에 이쁘게 개어진 이불과 베개를 그린 그림이었다.

같은 장소에서도 다른 시선으로 그 장소와 공간을 기억할 수도 있고, 오래된 기억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는 그것이 어반스케치와 그림의 매력인 것 같다.

[운현궁에서 함께 2021]

이불 위에 나란히 놓인 베개는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를 소환했다.

할머니는 어린 내게 " 아야, 베개 호청 꼬매게 좀 갖고 오이라"

하얀 베갯잇을 품에 안으면 풀을 먹여 빳빳한 촉감은 싫었지만, 포근한 햇볕 냄새는 정말 좋았다.

내가 베갯잇을 들고 들어가면 이미 방안엔 식구들 숫자만큼 베개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가기 전부터 할머니는 엄지와 검지에 침을 살짝 발라 실을 뾰족하게 꼬아 바늘구멍에 꿰려고 했지만 연거푸 실패 중이셨다. "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인다. 이거 좀 너어봐라."

조막손으로 건너온 바늘과 실은 대부분 한 번만에 꿰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베갯잇을 꿰매시는 할머니.

빳빳하게 마른 하얀 베갯잇 위에 베개 몸통을 올리고, 베갯잇 양쪽을 바짝 끌어당겨서 꿰매셨다. 어린 나는 왜 베갯잇을 바짝 당기는지 궁금해서 " 할매, 호청은 왜 당기는 데?"라고 물으면 "이래야 호청이랑 베개가 따로 안 논다"라고 하셨다.


세월이 가면 잊고 사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날 베개가 그려진 그림을 보지 못했다면, 아름답고 그리운 밤이 생각나지 않았겠지. 사는 게 바빠서 잊고 지내 미안하고 그리운 우리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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