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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Nov 09. 2022

기다리는 동안

법환 바당에서

[법환 바당 2021]

배가 부르면 세상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골목길을 들어섰는데 눈앞에 정박된 배들과 그 배들 밑의 일렁이는 그림자 물빛이 아름다웠다. 동네 이름조차 모르는 동네. 대략 가게 간판으로 대충 유추해 본다면 대포항. 포구는 정말 한산했다. 사람도 없고, 정박된 배들만 잔물결에 따라 작게 흔들렸다. 바닷가라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갈매기조차 보이지 않는 포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막다른 길목에서 다시 골목을 따라 올라왔더니 큰 도로가 나왔다.


11월에 왔을 땐 감귤 노지 밭엔 주황빛 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는데, 12월은 대다수가 푸른 잎들만 무성했다. 올레길도 간간이 걸었지만 대부분 아스팔트로 포장된 자전거 주행거리를 걸었다. 새콤한 귤 하나 딱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쯤 거짓말 보태지 않고 천혜향과 황금향을 파는 가판대가 보였다. 아무리 맛있는 귤이지만 먹고 남은 건 무거운 짐이라 두 개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사장님이 시식이라며 천혜향 두 개와 명함을 주셨다. "감사합니다." 명함은 롱 패딩 주머니에 집어넣고 천혜향은 까서 입안으로 넣었다. 껍질이 얇아 알맹이와 딱 달라붙어서 껍질을 벗길 때 알맹이가 조금 터졌다. 손에선 오랫동안 천혜향의 향기가 났다. 그 어떤 향수보다 달콤하고 상큼하게.


뚜벅뚜벅 걷던 우리들 눈앞에 약천사라는 팻말이 보였다. 천혜향을 먹기 전부터 아팠던 발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어서 나와 딸은 법환 바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딸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르막길도 씩씩하게 걸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법환 바당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 딸이 두 팔을 씩씩하게 흔들며 걸었던 오르막길 위를 나는 버스를 타고 달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스 창밖을 보다가 여전히 좌우로 두 팔을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딸이 보였다. 창문 열고 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카톡으로 응원을 남겼다.


법환 우체국에서 내려 법환 바당으로 내려가는 길, 소담한 카페가 보여 잠시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아쉬움 마음을 달래며 천천히 바다로 향했다. 제주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바다는 넓은 품으로 반겨주었다. 한쪽 귀퉁이에 앉아 딸이 오기 전까지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겨울 햇살 아래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얼굴이 따갑다. 따가운 햇살은 바다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그 아름다움을 스케치북에 담고 싶었다. 어깨 힘을 빼야 하는 데 잘 그리고 싶은 마음만 앞서서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삶이 그렇듯이 그림도 적재적소에만 힘주고 나머지는 힘을 빼고 그려야 지치지 않고 오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림 역시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어색한 그림을 마무리하고,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디쯤이야?"

" 도착해서 인증 도장 찍었는데 엄마는 어디야? 안 보이는 데?"

" 그쪽으로 갈게. 거기 있어."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한 시간 삼십 분동 안의 떨어졌던 시간. 같이 있었을 땐 몰랐던 소중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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