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 도황리 Jan 18. 2023

끌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방폭포와 청둥오리 그리고 야자수

여행 5일 차 아침. 어젯밤의 만찬의 여파는 꽤 쌨다. 그래도 오늘을 위해 우린 어제 남은 오메기떡을 먹었다. 호텔 카운터에 키를 반납하고, 호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가 묵었을 땐 1박에 3만 원이 채 안된 가격으로 가성비가 갑이었다. 외관은 유럽 풍이랄까. 아무튼 제주도에서 묵었던 그 어떤 호텔보다 가성비, 위치, 청결 등을 따져 10점 만점의 10점인 호텔.


유럽의 작은 호텔 같은 밀라노 호텔에서 출발한 우리는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등교하는 초등학생들과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건널목에서 교통도우미 엄마들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 모녀도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그날따라 흐린 제주의 하늘도 무색하리 만치 쨍쨍했다. 딸은 감회가 새로운지 어릴 적 등굣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둘러 출발한 보람이 있었다. 정방폭포의 맑고 웅장한 소리와 풍광을 우리 모녀가 독차지했다. 미처 깨지 못한 정신마저 폭포소리가 깨웠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선 물질하고 나오신 해녀분들이 좌판 준비를 하시며 제주 방언을 쏟아내고 계셨다.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는 언어. 그러나 오랜 유대감에서 맺어진 친밀함은 뜻을 알 수 없는 언어에서도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정방폭포는 천지연과 달리 바다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인지 겨울임에도 폭포수는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한 해 묵혀두었던 나쁜 생각들을 모조리 씻겨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와 달리 딸이 다양한 포즈를 취해줘서 내 손과 폰은 딸을 담는다고 바빴다.

그러다 발견한 청둥오리 한 마리. 웅장한 폭포소리에도 끄덕 없이 자갈들을 부리로 뒤적이고 있었다.


" 청둥오리가 왜 여기 있지?"

" 그니까. 친구도 없는 데."


나와 딸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내가 이제까지 본 바로는 청둥오리들은 무리 지어 다녔다. 그런데 그 청둥오리 곁엔 무리가 보이지 않고 혼자였다. 날개를 다쳤나 하는 마음에 날개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두 날개는 곱게 접힌 상태라 확인이 불가능했고, 한쪽 다리가 땅에 제대로 딛지 못한 채 절룩거렸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며, 부리로 계속 자갈돌을 뒤집는 그 오리를 보니까, 줄게 하나도 없는 우리 손이 미안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돌에 걸터앉아 청둥오리를 보았다.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자갈을 뒤지는 청둥오리는 마치 수행자처럼 느껴졌다.


가야 할 길은 멀고, 날은 잔뜩 찌푸렸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으니, 정방폭포와 청둥오리를 두고 다시 일어섰다. 제주도 남쪽으로 오면서 도로에 간간이 심어진 야자수를 자주 본다. 쭉 뻗은 야자수가 조금 전 두고 온 정방폭포수 같다고 생각하면서 왜 자꾸 야자수에게 마음을 끌어당기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갤러리 캔파운데이션에서 본 김보희 작가님의 작품 중에 푸른색 아크릴 바탕에 곧게 쭉 뻗은 두 그루의 야자수와 달. 그 그림이 전해 준 느낌이 아직 내 마음속에 살아서 야자수에게 끌어당겨지고 있는 거 아닐까.


"엄마, 이쪽으로."


먼저 앞서 걷고 있는 딸이 돌아본다.

나는 백두산에 가면 볼 수 있는 천지를 이곳 제주에서 보러 가는 중이다.  


이전 12화 저녁의 성대한 만찬을 위해 걸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