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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Jan 27. 2023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2021, 크리스마스이브. 제주도]

제주도 여행 가기 전 우린 각자 꼭 가보고 싶은 장소 몇 군데 뽑아 도보 일정에 넣었다.

그래서 해안가만 걸었던 우리가 중간산간에 있는 신흥리 동백마을 향한 것이다.

우릴 기다릴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적어도 한 두 명쯤은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마을은 텅 빈 것처럼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동백숲이라고 해서 아주 울창한 동백나무 숲을 기대했지만... 동백꽃 마저 거의 피지 않았고. 우리가 때를 잘 못 잡은 것이다.


마을 입구, 수줍게 한 두 송이 핀 동백나무 밑에 쇠사슬에 묶인 백구가 우릴 향해 맹렬히 짖었다. 텅 빈 마을을 혼자 지켜야 하는 견생의 사명감 때문인지 몰라도 방문객인 우린 백구 때문에 혼이 거의 반쯤 나갔다.  

백구의 목을 생각해서라도 어서 자리를 피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뛰다시피 걸었다.

벚꽃은 홑벚꽃이 먼저 피고 난 뒤 겹벚꽃이 핀다. 동백은 그렇지 않은지, 만개한 분홍 겹동백꽃잎이 바람에 날렸다. 동백 하면 동백꽃송이 전체가 뚝뚝 떨어지는 줄만 알았는데 또 하나를 배운다.


붉은 동백꽃 대신 마을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양지바른 곳에 토끼풀이 자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우리 큰딸은 내가 한 시간 동안 하나도 찾지 못하는 네잎클로버를 10분이면 몇 개나 찾는 재능이 있다.

그래서 토끼풀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 엄마, 5분만."


딸이 네잎클로버를 찾는 동안 주변에서 동백꽃을 볼 만한 곳을 검색을 했다.


" 찾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딸은 벌써 네잎클로버를 3개나 찾았다.


" 벌써? 대단하네. 사진 찍어 줄까?"

" 응"


딸이 들고 있는 네잎클로버를 찍고


" 근처에 경흥농원이 있다는데 거기엔 동백꽃이 많이 피었다는데 거기로 가보자."


지도를 보며 도로를 따라 한참 올라갔다. 도로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귤밭엔 이제까지 우리가 거쳐온 밭들과 달리 귤들이 꽤 많이 주렁주렁 달렸다. 노란 귤과 초록 귤잎 그리고 검은 현무암의 밭담. 그 세 가지 색들의 조합이 꽤나 근사하다. 평일이라 그런지 간혹 보이는 차는 아우토반을 달리는 것처럼 내리 달리고. 우린 느리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경흥농원 앞.

굳게 잠긴 문, 그 너머엔 진분홍 겹동백나무들이 보였다. 그 나무들 밑엔 분홍꽃잎이 주단처럼 깔렸고.

철문 사이로 바라본 진분홍 겹동백꽃.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분홍 동백꽃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신흥리에서부터 구름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조금 흐릴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면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금세 어둑해진 날씨 때문에  마냥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린 빠르게 걸었다. 버스를 타야 한 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버스정류장에서 검색을 해도 확인되는 버스는 없고, 십여 년 전 제주의 날씨 때문에 아주 힘들었던 기억만 스멀스멀 떠올랐다. 차도 잘 다니지 않는 이 도로를 택시를 부르면 과연 올까? 계속 시도 중이던  딸이


" 엄마, 택시 잡았어."


택시아저씨는 원래 우리가 탄 곳엔 택시들이 잘 가지 않는단다. 그런데 우리가 부른 그 시간 즈음 근처를 지나갔다가 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힘들 거 같아서 오셨다고 했다. 바람 속을 뚫고 달려와준 택시아저씨가 어찌나 고맙던지! 여행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는 곳에서 변수가 생긴다. 생각하긴 싫지만 만약 택시아저씨가 오지 않았다면 우린 어땠을까? 여행자의 신은 있는 것 같다. 벌써 두 번째, 우리가 아주 절실하고 급박한 순간에 택시를 보내주었다. 


숙소에 우리를 내려주고 택시는 빈차로 떠났다. 우린 서둘러 펜션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내려놓자마자 표선농협하나로마트로 갔다. 장을 다 보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비는 우리가 숙소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밖은 어둡고, 비바람 불고

따뜻한 방바닥에 마주 앉은 우리 앞에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맛있게 익어가고 있는 흑돼지.

그리고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전자레인지에서 방금 꺼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게 해 준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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