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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Mar 04. 2023

선물 같은 하루

 

[2021. 12.25]

목장 담장 그 너머, 종려나무 이파리 사이로 살짝 오렌지빛 초장이 보였다.

어떤 모습일지? 전체 풍경이 빨리 보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무겁던 다리가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담장 길을 벗어나자 오렌지빛 초장이 눈앞에 드넓게 펼쳐졌다. 날씨가 흐렸기에 바닷빛은 더욱 짙었다. 오렌지빛 초장과 짙푸른 바다는 한 마디로 풍경화였다. 그 풍경화 속의 오렌지빛의 정체는 귤껍질이다.  한약재로 쓰이는 귤껍질(진피)은 한약재와 화장춤 원료로 사용된다. 12월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12월 말 즈음 신천목장에선 귤껍질을 말린다고 했다. 그 귤껍질이 마르는 속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졌다. 마치 수채화의 그라데이션처럼.


"우와~!!!"

 

우리들의 감탄사에 가까이에서 일하시던 분이 흘깃 쳐다보았다.

일하시는 분들 입장에선 노동. 그러나 멀리 떨어져서 보는 여행자들인 우리에겐 정말 아름다운 풍경화.

인생도 그렇지 않나.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이런 말들이 그냥 생긴 말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존재하는 나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어찌나 바람이 거센지, 금방이라도 귀 뒤에 꽃만 꽂으면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원래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기념으로 남기고 싶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패스. 아쉬운 대로 풍경만 찍었다.

소리를 담을 수는 없지만 바다와 오렌지빛깔의 초장 그리고 바람. 아주 잠깐이었지만 구름 속에 숨은 햇살을 받은 금빛 물결의 일렁임을 폰카메라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오래 서있기도 힘든 바람에 우리 모녀는 다시 걸었다. 그날의 종착지인 성산일출봉을 향해서.

그날부터 우리의 날씨 요정은 또 다른 모습의 제주도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물론 바람이 불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여행 내내 따뜻하기만 했다면 우린 제주의 바람을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을 땐, 물때가 아니어서 보고자 하는 초록 광치기해변을 볼 수 없었다. 미리 인터넷에서 초록 이끼 낀 광치기 해변을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처음 보는 광치기 해변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어서.

[2021. 과자 상자 뒷면에 그린 창밖 풍경]

나는 먼저 버스를 타고 성산일출봉이 멀리 보이는 카페에 도착했다. 칼칼하고 따끔거리는 목을 위해 생강차를 시켜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걸어오는 딸이 오기까지 한참 남았고, 마땅히 그릴만한 종이가 없어서 빼빼로 상자를 뜯어서 창밖 풍경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걸어 올 딸 생각에 집중은 되지 않고.  


" 어디쯤이야?"

" 거의... 카맵에서 20분 뒤에 도착한대."

" 바람 많이 불제? "

" 응. 그런데 엄마, 나 손 시려서 통화 오래 못하겠어. "

" 알았어. 조심해서 와."

" 응."


씩씩한 딸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오래전 결혼식 때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결혼 전 날 "결혼식에서 신부가 웃으면 딸을 낳는다니까 절대 웃지 말거래이"라고 하셨다. 나는 결혼식 날, 정신하나 없는 와중에도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었다. 나의 소망은 할머니와 달리 딸 엄마였다. 그 속설대로 이루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난 두 딸의 엄마가 되었고, 큰딸과 여행 중이었다. 함께 온 여행이니 함께 끝까지 완주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어쩔 수 없이 하루에 한 번은 따로 또 같이 여행을 해야만 했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까, 안락한 카페에서도 마음은 바람 부는 벌판에 선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꾸 카페 입구만 쳐다보는 데, 바람냄새를 가득 품은 딸이 카페 문을 열고 내게로 왔다.

손이 꽁꽁 얼어 빨간 손을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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