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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Oct 23. 2022

야자수와 감동란

여행으로 발견한 것들

[여행에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다. 2021년]

어느새 여행의 반, 우린 제주의 남쪽 길을 걷고 있었다. 아침마다 개수가 하나씩 늘어가는 일회용 밴드와 파스는 고단한 여행의 훈장 같았다. 식전 댓바람부터 대포 주상절리를 보기 위해 우리는 일찍부터 서둘렀다.  


영겁의 시간 동안 바위와 파도의 밀당의 결과물은 기가 막히게 멋진 주상절리를 탄생시켰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신비롭고 멋지다. 대포 주상절리를 보고 이런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어휘력 한계를 느낀다. 썰물 시간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우리가 도착한 때는 밀물 시간이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대포 주상절리를 맛보기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내판에 적힌 내용은 기후변화 영향으로 수면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나, 우리, 사회, 대한민국, 전 세계인들이 일상에서 쉽고, 편해서 무분별하게 사용한 일회용품들이 떠올랐다. 최근 뉴스에서 자주 떠오른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자연재해뿐 아니라 지구의 모습을 변형시켰고, 눈앞에 있는 대포 주상절리는 그 증거였다. 어쩌면 몇 년 뒤 다시 주상절리를 찾을 땐 지금보다 더 많이 수면 밑으로 사라져 지금은 만조 때 물높이가 썰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부터라도 일회용품을 덜 사용하고 탄소배출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대포 주상절리.


대포 주상절리 옆 샛길, 쭉쭉 뻗은 야자수 길을 걸었다. 주상절리 옆 동네라 그런가. 작은 해변인데 주상절리가 있었다. 대포 주상절리의 바위는 세로로 길쭉길쭉하다면, 여기 바위는 드러누운 주상절리였다. 입장료도 없고, 사람들이 없어서 오롯이 우리들만의  고요하고 한적한 바닷가. 나와 딸은 바닷가에 앉아 어제 남은 주전부리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잠시 쉬었다. 잠이 안 올 때 들으면 딱 좋을 것 같은 파도 소리로 심신이 편안해져 늘어지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태생부터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나는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번 여행에서 좋아하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쭉쭉 뻗은 야자수 나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야자수만 보면 " 좋다. 너무 좋다."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야자수. 그 야자수가 제주도 공항에서 잠깐 보고 보지 못했는데 제주의 남쪽엔 더 자주, 더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직까지 날씨 요정은 우리 편이라 4일 내내 봄날 같은 날씨를 선물했다. 걷는 내내 사람들도,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는 제주의 길 위를 전세 놓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기분과 위장은 연계된 감각기관이 아니기에 위장은 밥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눈에 보이는 식당도 없고, 들어갈 마음도 없는 우리는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우기로 했다.

왜냐면 어제 맞은 침과 약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내 발에게 조금이라도 무게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법은 소식이 좋을 것 같아서. 반대편에 다른 편의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븐일레븐으로 들어갔다. 비록 편의점에서 먹는 간단한 식사지만, 야외 탁자가 놓여 있는 곳에 크고 노란 하귤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은 그 어떤 인테리어 장식보다 예뻐 보였다.


" 엄마, 이 거 정말 맛있데이." 딸은 편의점에 진열된 삶은 계란들 중에 감동란을 가리켰다.

" 삶은 계란이 다 거기서 거기지."

" 아니야, 이건 진짜 맛있어. 엄마도 먹어보면 깜짝 놀랄걸."

" 그럼 하나 사 보던지."

나는 다른 삶은 계란보다 조금 비싼 감동란을 집어 들면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탁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감동란 껍질을 벗겼다.

하얀 속살이 드러나고, 흰자의 탄성이 탱탱하게 손끝으로 전해졌다. 속으로 '뭐지?' 한 입 베었다.

노른자가 퍽퍽하지 않고 놀랄 정도로 부드러워 목안으로 훌러덩 넘어갔다. 그럼에도 조금도 목 막힘이 없었다. 처음 감동란을 만든 사람들은 누굴까?

" 엄마, 어때? 맛있제?"

" 와! 이렇게 맛있는 계란은 처음 묵어본다. 진짜 이름 그대로 감동란 맞네."

작고 뽀 계란이 그 아침 내게 작은 감동을 주었다. 그날 그 감동란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집에 와서 몇 번의 도전 끝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날 그 아침에 먹었던 감동란만큼의 감동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삶은 계란보다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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