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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Sep 26. 2022

길고 긴 하루였지만, 해피엔딩

공백과 여백의 시간 그리고 관계에 대한 생각

[길고 긴 하루 2021]

길을 찾았다는 딸의 전화는 없었다. 평소와 달리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림에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후다닥 끝내고 다시 톡을 보냈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록 딸에게 보낸 톡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 아직 길 못 찾았나?" 조바심에 안달이 나서 기어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찾았어. 15분 뒤에 도착한다니까 좀 만 기다리셩. 내가 아주 무섭고, 재밌는 모험담을 얘기해 줄 테니까 기대하고. " 핸드폰 너머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딸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은 미어캣처럼 자리에 일어나 고개를 뺄 수 있는 한 최대한 빼고 딸이 걸어 올 방향을 보며, 같이 있지 않은 시간 동안의 공백과 여백에 대해 생각을 했다. 둘의 공통점은 비어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 공백은 그냥 말 그대로 빈 것으로서 허전하고 어설프지만, 여백은 빈 그 공간마저 그림이 된다. 그 공백과 여백은 시간에도,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딸과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여백의 시간으로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고 싶었지만, 딸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길을 찾지 못하겠다는 그 말에 여유는 사라지고, 딸과 나의 공백의 시간에 대해 조바심을 쳤다. 그러다 그 어떤 상황이어도 꼭 길을 찾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와 딸의 여백관계로 계속 이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고 작지만 분명한 딸이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왜 길을 잃고 헤맸는지 자세한  모르겠지만, 혼자 길을 잃어 고생했을 딸에게 줄 아이스크림과 물을 편의점에서 사서 탁자 위에 놓고 기다렸다.


물을 보자마자 딸은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 수고했어." 딸이 의자에 앉자, 나는 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 웬 아이스크림 ㅎㅎ"

" 길 찾는다고 식겁했을 텐데 무라."

나는 내 몫의 콘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벗기며 말했다.

딸은 콘 아이스크림을 벗겨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은 따뜻한 방에서 이불 덮고 먹어야 제 맛이지만, 무사히 길을 찾은 딸과 먹는 아이스크림도 달고, 시원하고, 맛있었다.  

" 좀 더 쉬었다가 갈래?"

" 아니. 내가 늦게 왔으니까 엄마 다리만 안 아프면 가자."

우리 둘은 다시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한 시간 넘게 쉬었더니 발이 한결 가볍고, 딸의 모험 이야기를 들을 준비도 되어 있고.

" 왜 길을 못 찾았는지 이야기해 준다며."

" 엄마도 봤잖아. 산모퉁이 넘어가는 거.

" 응."

" 근데 뒤쪽으로 넘어가서, 네이버 지도가 가리키는 길로 가니까 파란색으로 엑스표가 그어져 있고, 낙석위험이라고 적혀있더라고. 해변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새 발자국만 몇 개 찍혀 있고. 길을 찾으려고 해도 한쪽은 바다지, 한쪽은 낙석위험, 파란 엑스 표지. 내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진짜 '캐스트 어웨이'나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표류된 줄 알았다니까. "

" 그런데 어떻게 찾았어."

" 119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때 숲 속 동굴 같은 데서 비키니 입은 여자랑, 삼각 수영복 입은 남자가 보트 끌고 나오다가 나랑 눈이 딱 마주쳤어. 순간 나도, 그 사람들도 한 10초 정도 얼음 상태였다가 내가 퍼뜩 정신 차리고 그 사람들한테 길을 물었지."

" 하하하하하하. 니도 깜짝 놀랐겠지만, 수영복 입은 그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겠노."

" 순간 여기가 어디? 나는 누구? 생각했다니까. 그 사람들 역시 많이 놀란 거 같긴 하더라."

" 안 놀라겠나? 자기들은 비키니에 삼각 수영복 입고 있는데, 시커먼 롱 패딩에 커다란 가방 멘 여자애가 다가와서 길을 물어보는데ㅎㅎㅎ"

" 하긴 ㅎㅎㅎ. 지금은 웃고 말하지만 그땐 진짜 심각했어."

" 진짜 평생 못 잊을 재밌는 추억 하나 찐하게 남겼다."

나와 딸은 길 사정에 따라 나란히, 혹은 앞 뒤로 걸어가면서, 흥미진진했었던 모험으로 포장된 조난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가 있는 서귀포로 향했다. 서귀포가 가까워질수록 밭담 너머로 노란 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비타민 C가 흡수될 일은 없지만, 새콤달콤한 향기와 주황빛의 귤이 지친 여행자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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