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일대
누구나 비 오는 날의 추억 하나쯤은 품고 산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동안 북촌 쪽으로 어반을 다녔다.
그러다 올 해부터 간간히 서촌을 갔는데, 서촌은 개량 한옥과 빌라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북촌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였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일기예보에 대개 민감해진다. 특히나 비가 오면 일주일 전에 장소가 정해졌더라도 일정이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약속 날 아침 날씨에 변화가 있으면 단톡방이 불이 난다.
6월, 그날 아침에도 그랬다.
분명 전 날 일기예보에서 오후부터 내린다던 비가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몰고 오더니 쏟아졌다.
어반 단톡방엔 쏟아지는 비처럼 화우들의 말들이 쏟아지고, 오늘은 어반을 패스 하자는 중론이 모여졌다.
어반도 없겠다 잠이나 더 자볼까 싶어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자려고 하니 이미 깬 잠이 다시 올리는 없고,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는데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창 밖에 햇살이 들어왔다.
단톡방엔 다시 활기를 되찾은 말들이 쏟아지고, 마음은 이미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서촌에 도착하니 날씨가 또다시 꾸물꾸물.
비가 오기 전에 한 장이라도 그림을 그리려는 화우들 마음이 바빠지고, 골목 투어는 나중으로 미루고 처음 들어간 골목에서 각자 흩어져 자릴 잡았다.
다행히 그 골목길엔 개량 한옥과 어울리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그리고 활짝 핀 해바라기도.
주어진 시간은 보통 때보다 삼십 분 당겨져서 한 시간. 나는 자리를 잡은 화우와 화단에 핀 해바라기를 그리기로 했다.
툭
빗방울이 스케치북 위에 떨어졌다.
'스케치북을 접어야 하나?' '조금만 더 칠하자'
마음속으로 야속한 비와 밀당을 했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세기가 굵어지고 빨라지고.
우산을 펼치고 빗물로 범람하기 전에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빗물을 토해냈다. 화장지로 물기를 대충 닦고 화구들을 쑤셔 넣고 있는데 먼저 짐을 싼 화우가 우산을 받쳐준다.
고마운 화우 덕분에 못다 칠한 스케치북이지만 인증샷도 남기고, 남의 빌라 처마 밑으로 후다닥 뛰었다.
이미 처마 밑에는 화우들이 와있었다.
" 왜 이리 늦었어?"
이미 처마 밑에서 기다리신 왕샘이 물었다.
" 프로는 달라요. 비가 쏟아지는 데도 인증샷 찍었어요."
내 우산을 받쳐주던 화우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 샘 덕분이야 ㅎㅎ"
그날 비록 비가 왔지만 우리들은 서로 못 다 그린 그림들에 대해 피드백했고, 곧 먹게 될 점심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우며 빗속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