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것을 실천해 나갈 용기가 필요하다
블랙리스트(blacklist) 대신 블록리스트(blocklist), 화이트리스트(whitelist)가 아닌 얼로우리스트(allowlist). 최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조직 내 빈번하게 사용되던 비즈니스 용어를 잇따라 변경하고 있다. 인종차별적 의미가 담긴 용어의 미사용을 시작으로 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조직 내 구성원이 다양해짐에 따라 인종, 성별, 신체특성, 연령, 종교, 성향에 따른 차별 철폐 및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조처가 요구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누군가를 폄하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중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해당 기업에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훼손을 가져온다. 반면, 제품에서 화이트닝(whitening), 레드 스킨스(red skins)라는 문구를 삭제한 로레알, 네슬레처럼 변화를 선도하는 기업은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는다.
리더십은 어떠한가? 상사와 부하 사이의 힘의 불균형이 만들어 낸 권위적인 리더십이 존중과 포용이 필요한 우리 조직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는가? 일의 주체는 회사에서 개인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리더십은 구성원들 간 상호작용에서 그 힘이 발현되고 있다. 이제 새로운 리더십을 받아들일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리더의 행동에 반영될 새로운 원칙과 가치로 '인클루시브 리더십(Inclusive Leadership)’이 떠오르고 있다. 인클루시브는 '포괄적인, 폭넓은, 포함된'으로 번역된다. 이를 조직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포용하는, 융화된, 어우러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초기 인클루시브 리더십은 장애인, 여성, 유색 인종과 같은 특정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과 포용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필자는 이 개념을 '조직 내에서 비주류에 해당하는 모든 소수그룹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인정하는 행동'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인클루시브 리더십의 핵심 행동은 ‘다양성(Diversity)’과 ‘포용성(Inclusion)’이다. 다양성이 나와 다른 사람을 파티에 초대하는 것이라면, 포용성은 그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Verna Myers). 다양한 대상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클루시브 리더십은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존중하고 어우러지는 포용'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포용은 맹목적인 수용과는 다르다. 주류 집단이 갖는 동질성에 다양성을 지닌 팀의 창의성과 개방성을 추가하여 더 다채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새로 들어온 인턴사원이 면담을 신청해 왔다. 정규 채용의 성비 균형 여부, 여성 인재 중 해외파견자 및 임원의 유무, 평균 육아휴직 기간 등 그 질문은 놀라우리만치 구체적이다. 이처럼 다양성과 포용의 조직문화에 대한 Z세대의 관심과 기대는 크다.
하지만 우리 조직의 현실은 어떠한가? 여성 인재가 중요하다는 점은 남녀 구분 없이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직장 내 여성 관련 인사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비정규직, 고졸 사원, 장애인, 외국인 직원을 위한 D&I 제도 역시, 조직 내에서 힘을 받기 어렵고 때로는 역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조직 내 성숙하지 못한 시각과 미흡한 준비 속 HR의 성급한 추진은 자칫 포용의 대상자를 더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몇 년 전, 임원 후보자가 된 여성 이사로부터 본인이 후보임을 비밀로 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글로벌 D&I 정책에 따라 여성 리더의 비율을 높이는 안이 논의 중이었는데, ‘조직 내 중요 보직에 대한 여성 할당 정책이 회사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가, 또는 그 반대인가’에 대한 논쟁 속에서 특혜 대상자로 거론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제도 도입 시 사내 의견 교류는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며 실제 그 여성 후보가 높은 성과와 긍정적인 평판을 지닌 인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위축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마도 여성 우대정책이 여성 엘리트들에 대한 편견을 가져와 그동안의 성과가 평가절하되거나 개인의 자부심을 훼손하는 직/간접적 경험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양성 확보를 위한 제도 도입은 이렇듯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차별 해소를 위한 제도가 또 다른 차별을 만들면 안 되기에, 다양성 관련 제도 도입 시 섬세한 기획이 필요하다. 우선 기본적으로 구성원 모두가 새로운 제도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범위와 기준이 명확하며, 진행 절차와 효과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그 외, 제도 도입 시 고려해야 할 사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우리 회사의 수용도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파악하라
아래의 내용 중, 현 조직에 해당되는 사항은 몇 가지가 있는지 확인하여 D&I 문화 수용 가능 여부를 사전 진단해 보자.
상기 15개 문항 중, 10개 이상의 문항에 ‘그렇다’로 응답한 경우, D&I 문화 정착을 위한 직접적인 활동을 시작해도 되겠지만, 5개 미만의 문항만 해당된다면, 기본적인 소통의 문화부터 정착시키는 것이 우선이며, 섣불리 D&I 관련 제도를 도입할 경우, 심한 반발에 부딪힐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5~9개 문항에 ‘그렇다’로 응답했다면, 변화의 정도를 고민하여, 합리적 수준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자. 예를 들어, 여성 임원이 없는 상태인데 올해 당장 3명의 여성 임원을 선발한다거나 하반기 장애인 채용 비율을 두 배 이상 높인다거나 하는 급진적 변화는 기존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특히, 승진, 평가, 업무 배정과 관련된 사항은 구성원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이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직원들과 밀접한 근무 환경부터 변화시켜 나가며 천천히 D&I 문화에 젖어들게 하자.
2. 변화의 리더와 단위를 유연하게 선정하라
매번 똑같은 사람,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조직문화 개선 운동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식상할뿐더러 피로감을 준다. 사내에 영향력이 크고 평판이 좋은 리더를 중심으로 D&I 에이전트 풀(D&I Agent Pool)을 새롭게 구성하고, 그 풀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하자. 이 방법은 D&I 프로젝트를 신선하게 받아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 해당 프로젝트의 체인저를 다수로 구성함으로써 변화의 파급력을 높인다. 체인지 에이전트(Change Agent)의 직급과 관리해야 할 팀의 단위 또한 횡/종적으로 유연하게 선정하자. 예를 들어, 평판이 좋고 포용의 리더십이 있는 본부장급 리더가 있다면 해당 조직은 본부 단위로 변화를 일으키고, 특정 기수에 유독 따르는 이가 많은 직원이 있다면 해당 직급 및 연차는 그 에이전트가 담당하도록 지정하자. 신입사원부터 임원까지 어느 직급이라도 체인저가 될 수 있게끔 하는 등 HR의 유연한 시각이 필요하다. D&I 가치를 전파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행사, 프로그램을 제시하여, 대상자에 교집합이 생기더라도 지루해하지 않도록 지원하고, 사각지대에 있는 구성원은 HR이 직접 케어하자.
3.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라
다양성을 위한 제도 개선에 앞장서던 조직의 리더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앞에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신규 고객 창출, 수익성 개선과 같이 조직 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면 모를까, 다양성과 포용의 조직 문화 구축은 주목을 받기도, 성과를 이뤄내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동안의 차별을 시정하고 실질적으로 약자의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평등(Equality)'에서 '공정(Equity)'으로, 지금과는 다른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회사에서 막대한 재원을 들여 양성한 인력이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제도 미비로 퇴사하는 것을 방지하고, 모든 임직원의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보다 긍정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다. HR은 구성원들에게 우리 회사가 D&I에 앞장서고 있다는 자부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4. 젠더 이슈가 아닌 통합의 이슈로 그 범위를 확대하라
많은 회사의 여성위원회가 여성 인재들과 간담회를 하며 불평등 사례를 조사해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 수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여성위원회가 추진하는 일들이 편향된 움직임으로 비추어져 남녀 갈등을 유발한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실 여성위원회 출범 의도는 남성, 여성을 구분하는 젠더 이슈가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조직의 모든 임직원이 하나가 되는 통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임직원을 대상으로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훌륭한 인재들이 좋은 회사를 만들어 나가고, 좋은 회사가 또 임직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포용적인 조직문화 만들기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출범 의도에 맞추어, 여성위원회 지원 대상을 보다 포괄적인 범위로 확대해 보자. ‘워킹맘을 위한 행사’는 임직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가족 초청행사’로 변경할 수 있고, 교육을 진행할 경우 그 강사와 대상을 ‘여성’만이 아닌 ‘남녀’ 모두로 확대할 수 있다. HR의 메시지 역시 ‘여성 우대 정책 수립’보다는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면 리더가 될 수 있는 문화 만들기’로 바꾸어 보자.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내부 홍보를 병행하자. 이러한 노력이 쌓이면 조직문화 개선 활동에 대한 역차별 논란을 줄이고 임직원으로부터 더 큰 이해와 신뢰를 받을 수 있다.
5.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문가가 되도록 지원하라
여전히 조직 내에서 여성, 장애인 등 소수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직원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당장 내 앞길이 중요하지, 더디게만 진행되는 회사의 변화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이 조직 내 리더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분명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조언을 구할만한 멘토가 없어,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판단된다면 이들에게 회사 밖의 프로그램을 제공하자. 정부기관 및 전문교육업체에서는 여성 인재 양성을 위한 멘토링, 네트워킹 프로그램, 글로벌 여성 리더 초청 강연 등 포용의 대상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많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외부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여 커리어에 대한 일대일 조언을 받아보도록 지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학습 및 코칭을 받은 이들이 조직으로 돌아와, 자신의 전문성을 키우고 영향력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자.
D&I 정책에 편승하여 쉽게 일자리를 얻거나 승진을 한들, 조직 내에서 인정받는 리더가 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노력에 달려있음을 명확히 전달하자. 다양성 및 포용의 조직 문화는, 의사결정권자가 기존의 친숙한 인재집단을 넘어 더 넓은 범위로 후보를 탐색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동안 소외된 인재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련된 공정한 경쟁의 장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사자의 전문성이 중요하다. 내가 맡은 업무에서는 성별, 신체특성, 인종, 성향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동료들이 알 수 있도록,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여러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제도를 잘 활용하고 유지하느냐에 있다. 그렇기에 D&I 조직 문화 구축은 길고도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HR 업무 중 어디 쉬운 것이 있던가. 우리는 그 힘듦 속에서도 많은 것을 해내 온 단단한 사람이다. 믿는 것을 실천해 나갈 용기를 가지고, 보다 나은 조직과 세상을 만들어 나갈 당신을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 상기 글의 주요 내용은 인사관리 전문지인 HR Insight에도 게재하였습니다.
https://www.hrinsight.co.kr/view/view.asp?in_cate=114&bi_pidx=32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