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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조이 Sep 21. 2023

TV를 끄는 효과적인 방법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TV리모컨을 내려놓고 음악을 켭니다.

  제가 어릴 때 TV 채널은 KBS, MBC, TBC 3개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에 EBS가 개국하자 4개의 선택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7~80년대 TV는 커다란 갈색 직육면체 상자 같이 생겼는데 아래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4개의 긴 받침다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TV 브라운관 양쪽에는 슬라이딩되는 자바라 문이 있어서 잡아당기면 브라운관은 깜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자바라 문은 갈색이었는데 TV를 보지 않을 때는 항상 자바라 문을 닫아두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TV를 갈색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자바라 문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외출하시기 전에 TV를 잠그시고 열쇠를 숨겨두었습니다. 숙제도 안 하고 하루종일 TV 앞에만 앉아있을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이었지요. 우리는 부모님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각자 흩어져서 집의 구석진 자리를 뒤졌습니다. TV 열쇠를 찾기 위해서였지요. 잠겨진 문이 열리면 온갖 재미있는 볼거리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으니깐요.     


  그때나 지금이나 TV 속 세상은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주말이면 저는 종종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취향 저격의 영화 감상은 기본이고 카메라 앵글에 담기는 세계 여러 나라의 모습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대세 연예인의 연출된 사생활을 즐겨 보기도 했고 평범한 사람의 성공담에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친근한 수다로 풀어줘서 제가 모르던 분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플러스하기도 했습니다. 리모컨 하나로 지상파에서 종편으로, 종편에서 OTT로 넘나들다 보면 어느새 바깥은 어둑어둑해집니다.     


   좋은 영화와 프로그램을 보며 재미도 있었고 배운 점도 있었는데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TV와 함께 보낸 하루가 끝나고 밤이 되면 분명히 소파에 드러누워 쉬었는데 몸은 찌뿌둥하고 마음도 무거웠습니다. '코치 포테이토', 학창 시절에 배운 단어 하나가 툭 튀어 올랐습니다. 소파에 파묻혀 하루 종일 TV만 보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제가 원한 휴식은 '코치 포테이토'가 아니었습니다. 신선한 공기 마시며 산책도 하고 서재에서 좋아하는 책도 읽고 싶었는데 잠시 보려고 켠 TV 앞에서 그만 주말을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프로그램 편성이 제한적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지상파뿐만 아니라 종편, OTT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내용과 지식이라 하더라도 끝없이 펼쳐지는 영상 속 세계에 맥없이 끌려다니며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고 난 다음에 오는 감정은 무력감과 허무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영상보다 듣는 콘텐츠를 선호합니다. TV대신 유튜브 강의를 듣거나 오디오북을 듣습니다. 안마의자에 누워 유튜브 소설을 듣고 집안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습니다. 듣는 콘텐츠는 영상 콘텐츠처럼 수동적으로 앉아있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 시간을 완전히 앗아가지 않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무엇보다 TV처럼 끝없이 새로운 영상으로 내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적당히 듣고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TV 적당히 보기'는 자라는 아이에게만큼 퇴직자에게도 필요한 충고입니다. 어쩌면 채널이 3개밖에 없던 그때부터 TV 중독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TV 열쇠 대신 편리한 리모컨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버튼 하나로 열리는 콘텐츠의 홍수에 하루를 떠밀려 다니지 않으려면 리모컨을 숨겨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리모컨을 감춰줄 부모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소중한 하루를 TV 앞에 발목 잡힌 채 보내지 않기 위해 큰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짱구야 TV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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