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하며 짬짬이 자신을 표현하는 활동을 한다.닉네임을 가진 그 삶을 부캐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부캐를 성실하게 잘 다듬고 꾸려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분야건 상관없이 탁월해졌다.
그런 탁월해진 개인에게는 부캐는 이미 본캐이고 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자기 일부 혹은 자기 자신이다.꾸며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원래 있던 것을 끄집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 데미안
엄마, 아내, 며느리, 딸, 자영업자로 사는 동안 나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조금 더 수줍다. 일상에서 '내 안의 나'를 드러내는 것이 이젠 sns보다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SNS를 하는 것 같다. 사유하고, 작업하고, 표출하며 소통한다.
그 의지가 담긴 활동 안에서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진심이 담겨있고 그걸 보는 사람들은 그 진심을 느낄 줄 안다. 보이는 것들이 모순과 거짓이기만 하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하고 또 재밌어 할리가 없단 말이다.
자신이 에너지를 쓰는 곳이 본캐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 사람을 알려면 마주 앉아 있는 것보다 그가 에너지를 쏟아서 무엇을 해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빠를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어쨌거나 늘 가면을 쓰고 살고 있고, 자신의 경험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상대가 바라보는 자신과 일치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은 분명 있다.
부캐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할에 맞춰 정형화된 내가 아닌 자유로운 진정한 나를 가꿔보겠다는 말인듯하다.그 과정 자체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수련이 되기도 하고 인생의 순례길이 되고, 자아의 신화에 이르는 연금술이 되는 것이다.
지금 어디에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지금 어디에 돈과 시간을 쓰고 있는가?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돈과 시간을 쓴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돈과 시간 사랑은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글을 쓰며 알게 된 나에 대하여
인간은 주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자연과 사물을 알 수는 있어도,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결코 충분히 알 수 없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인지는 우리의 신체로 드러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의 말과 행위에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에게 동조하거나 '맞서지 말고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안의 둘'로 나에게 말을 거는 행위, 즉 사유라는 것을 가능하게 인식이다.
가끔 나 자신에게 말을 걸듯이, 일기를 쓰듯이 새어 나오는 어떤 생각들이 바로 사유이지 않을까.당신은 사유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주어진 일을 하고 흐르다 보면 '살아지니 산다'라는 말처럼 살게 된다. 목표도 기대도 희망도 실망도 없이 무감각의 상태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 그것은 무책임한 삶이다.
부지런한 사람들,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은 하나의 부캐도 모자라게 자신의 여러 가지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멀티플레이어가 된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런 사람을 멋있게 바라보는 나 같은 사람들은 그들을 동경한다. 용기 있고 부지런하고, 심지어 스스로 즐기고 있는 모습은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 활동이다.
인간이 사유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의지를 표출한 현상이 바로 부캐다. 부캐에 진정성이 더해진다면 부캐의 활동은 살아가는 진짜 이유가 되기에 점점 본캐로 나아가며 그것은 세상에 드러나고 나를 설명하게 된다.
진짜 살아있는 고유한 인간!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따르는 한,
인간은 누구든 경이로운 존재이며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헤르만 헤세
이름을 갖는 것. 그것이 핵심이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말을 스스로 선택해
자기 삶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축복할 줄 알아야 한다.그래서 그들의 부캐는 이미 본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