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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시선이나 관계 회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아이의 아픈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조심스럽게 치유가 되어 간다.

by 김정희 Mar 21. 2025

이혼을 하게 되면 가족의 형태가 바뀌게 된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사람들의 보는 시선이나 가족의 형태가 바뀌게 된다.

나는 다만, 결혼 생활이 힘들어서 이혼을 했을 뿐인데, 주변엔 그러한 가정을 한부모 가정 내지는 결손가정이라고 부른다.


결손가정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크게 모자람이 없었고, 남들 하는 것보다 과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키웠는데 결손가정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린다.


한부모 가족은 이혼, 사별 또는 미혼모, 미혼부로 인해 한쪽 부모만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는 형태를 말한다. 우리나라도 2020년 기준으로 약 23%가 한부모 가정이라고 한다.


이혼을 하면 자연스럽게 결손가정의 아이가 된다는 기가 막힌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부정적인 뉘앙스는 내가 결혼에 실패했다는 낙인을 찍는 것이며, 결혼의 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와도 같다는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현실과는 아주 다른 관계유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그대로인 듯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 보이나 여전히 보수적이며, 기존의 고정관념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혼이 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뒤로 가서는 쑤군대는 이치와 같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피해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성인까지 다 키우지 못하고 중간에 이혼을 한다고 해서 가정 자체가 결손이라는 것은 뭔가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내 사랑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아빠의 사랑이 모자란 것도 아니다.

다만, 엄마 아빠 각자의 애정에 문제가 있어서 같이 살지 않는 것뿐이다.  

아이가 그 누구를 만나는지도 아이의 의지이며 제약도 없다.

그런데도 법에서는 결손가정이라고 부르며,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어딘가 불쌍한 아이라는 의미로 인식을 한다.


결손가정이라는 말은 구시대적 언어이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전형이다.


 "결손가정"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특정 가정 형태를 결핍된 상태로 간주하는 일종의 폭력에 해당한다.


결손이라는 단어가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문제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사회적 차별이나 낮은 자존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사회는 한 부모 가족이거나 조부모 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낙인을 찍는 것이다.


이혼한 첫해에는 이혼한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아이에게 혹여라도 피해가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형제도 나중에나 알렸고, 친구나 지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알려서 좋을 것이 없는 일 같았다.

적어도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가족은 몰라도 지인들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군다나 학교에는.


그러나 아이가 학교에 등본을 제출하면, 나는 없는 사람이 된다.

같이 살고 있지 않고, 친권을 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이 된다.

그 사실을 선생님만 알고 있을 텐데도 어느새 학부모들이 다 알게 되는 일도 있었다.


친하던 학부형들이 색안경을 끼고 본다 거나, 처음엔 이해한다고 하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경험을 했다.

어쩔 수 없다. 이런 일들은.

다만, 이런 현상을 극복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숨어 있지 말고, 뒤로 숨지 말고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는 것.


그렇게 멀어질 사람은 멀어지고 이해하고 가까워질 사람들은 더 가까워진다.


나의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돌아설 사람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다.

아주 쉽게 인간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잘 됐다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시간을 공유하지 않아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와의 관계였다.


매일매일 얼굴을 보던 녀석을 이젠 매일매일 볼 수가 없다는 것은, 어쨌든 거리감이 생기는 일이었다.

아이와의 관계에도 조금씩 균열이 가게 마련이다.


아이는 그때 엄마 아빠가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라도 한 일이 있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 본 일도 처음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이혼하고 상대편이 잘 살아주면 그나마 고마운 일인데, 내 경우는 그렇지가 못했다.

모든 걸 다 주고 나왔는데 그는 2년을 못 버텼다.


갑자기 기울어진 형편이 엄마나 아빠나 둘 다 마찬가 지여서 아이는 아마도 이중으로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내 상황이 엄중해서 아이의 아픔은 뒷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혼이 아이에게 설명한다고 설명이 되는 일도 아니고, 가족회의를 통해 가부가 결정되는 사항도 아니라서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성인이 되면 이해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러한 커다란 상처를 준 관계 회복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서로를 이해하는 수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나 자신을 합리화 하려고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어 봐야 아이에게는 엄마이고 아빠이다.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른들의 고민과 이유에는 너무나 많은 사연들이 존재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아이와 이야기를 하니, 아이는 ‘그때 엄마는 할 만큼 했어’라는 말을 고맙게 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차차 생활에 안정을 찾으면서 작게나마 아이를 독립시켰고,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은 그것밖에 해주지 못하고 있지만, 좀 더 나아지리라 생각을 한다.


시간이 흘러야 천천히 해결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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