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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06. 2024

05 스타 시간강사 허경일


시간강사, 그러니까 허경일이라는 사람은 그 어느때 보다도 많은 메일을 받기 시작했다. 논문 투고를 제의하는 메일부터, 이미 투고한 논문을 연구 주제의 보조 논거로 사용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메일, 강의 요청 등이 쏟아졌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년 이상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을 일주일에 한 번 수급받는 그에게 논문을 쓰는 일은 매일 아침 영양제 통을 열어 종합비타민을 먹는 것 만큼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머리에 있는 것을 종이에 옮겨 적는 일 정도가 되었으므로. 덕분에 허경일은 그 이전보다 훨씬 바빠졌다. 특강을 다니고, 논문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 가끔 악수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국내파 시간강사들의 대통령쯤으로 추앙받았다.


“김정서에 대해 문의 드립니다.”


그 메일을 처음 의도치 않게 무시한 것은 허경일의 일상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김정서라니,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 이름이 띄워져있는 메일을 확인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몇 주가 지난 후, 가득 차버린 메일함을 정리하던 그는 그제야 그 메일을 보낸 발신인이 얼마 전 자신과 악수를 한 교수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심지어 교수가 그 이후로 메일을 두 통이나 더 보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찝찝한 것이 가득 묻어 있을 것이 뻔 한 메일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아직 마모되지 않은 양심이 남아있었던 까닭인지 그 메일을 열었다.


첫 메일에는 김정서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 담겨있었다. 김정서라는 인물이 좋아하는 음식과 즐겨듣던 음악,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등이 메일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허경일은 김정서에 대한 TMI가 담긴 긴 메일을 마우스 스크롤 한 방으로 넘겨버렸다. 김정서가 누군지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예전 허경일의 머릿속에 있던 기억의 단편이었을 것이다. “허경일 선생님과 악수를 한 직후에 이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메일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므로. 두 번째 메일부터는 교수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아내에 대한 기억 일부를 악수를 한 이후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허경일은 아내에 대한 교수의 이야기도 대충 마우스 스크롤 한 방으로 넘겨버렸다. 마지막 세 번째 메일에는 한 가지 가설이 담겨 있었다.


“이상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아내에 대한 기억은 허경일 선생이 오래 전 알고 지내던 김정서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과 완전히 바뀐 것 같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한 번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정서라는 사람도 허 선생의 인생에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경일은 메일창을 닫고 팔짱을 낀 채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김정서라는 인물과 마찬가지로 교수의 아내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도 머릿속에 전혀 남아있는 바가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허경일의 머릿속에 김정서와 교수의 이름 모를 아내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었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 기억은 아마 어떤 전문 지식과 바꿔치기 된 이후일 것이다. 지식이 빠져나간 후에는 빠져나간 지식의 종류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기에 교수의 아내라는 사람의 기억이 어떤 전문지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도르노? 알튀세르에 대한 영미 철학적 해석? 동양철학? 확실한 것은 없었다.


허경일은 손톱의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교수에게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어떨까. 교수가 능력의 진실을 마주한 이후에 보일 반응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교수가 이 모든 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확률은 매우 적어보였다. 이제 겨우 두 해를 산 허경일의 딸이 허경일에게 그간 키워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할 확률과 맞먹을 만큼. TV에 나오는 교수는 선량하고 느릿느릿 자신의 입장을 밝히던 사람이었지만, 메일을 세 번이나 썼을 만큼 조급한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니 교수가 무척이나 화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재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면, 교수는 허경일을 학계에 매장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런 힘 정도는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득과 실이 허경일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았다.


어차피 증거는 없으니까. 허경일은 그 메일을 무시하기로 했다.  


“교수님. 얼마 전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관해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저와 교수님의 지식이 바뀌었던 사건 말입니다.” 


메일함에 쌓인 메일을 모조리 디지털 세상 바깥으로 날려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허경일은 순간 멈칫했다. 확인하지 않은 메일들 중 딱 봐도 아주 중요한 메일이 있었던 탓이다. 김재이. 메일의 발신자에 표시된 이름이었다. 허경일이 절대로 까먹을 수 없던 이름이기도 했다. 바로 어제 발송된 메일이었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메일 본문은 교수가 보낸 장황한 메일과 달리 아주 짧았다. 허경일은 메일 맨 하단에 쓰여 있는 김재이의 연락처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득과 실이 다시 한 번 허경일의 머릿속에 빠르게 맴돌았다. 증거. 김재이는 이 모든 일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허경일은 아까 읽었던 교수의 메일과 달리 학생의 메일을 무시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을 김재이가 불러올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허경일은 교수의 메일을 열어본 후 한참이나 고민했던 것과 비슷한 시간동안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김재이의 연락처로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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