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마몬 Oct 04. 2024

03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1)


교수는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도 교수, 어머니도 교수인 집안에서 자라나 원하는 공부를 하는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인기 있다고 부를 수 없을만한 학문인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교수는 부모에게 걱정 대신 격려를 먼저 받았다.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가고, 박사가 된 후, 교수가 되는 루트는 교수의 인생에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과적으로 교수는 해외에 있는 명문 대학 박사 학위를 따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 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몇 해 전에는 비트코인을 사 모으는 젊은이들과 K팝 유명 아이돌의 성공 신화를 자크 데리다의 사상에 빗대어 설명한 책이 대 히트를 쳐서 TV 프로그램 공식 패널로 초청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젊은 교수들 중에서는 가장 잘나가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게 돌아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딱 마음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게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그와 딴판이었다. 첫 만남 때부터 아내는 줄 곳 그래왔다. 잠깐 팀플을 같이한 사이일 뿐인데 아내는 심심할 때마다 그에게 연락을 해서 집밖으로 불러냈고, 그가 평소에 거리를 두던 것들을 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그는 처음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해봤다. 아주 시끄러운 노래가 나오는 술집도 가고, 아내가 붙잡는 터라 강의에 지각도 해보고, 잔뜩 취한 아내를 업어 집으로 데려다주다가 장인어른에게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때마다 고역이라는 표정을 그가 지어보이면, 아내는 그를 “촌스러운 사람”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유학을 간 그를 기다리고, 편지를 쓰고, 휴가 때면 독일까지 날아가 그를 만났다. 그와 아내는 여러 면모에서 잘 맞는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어쩐지 그는 아내의 부탁이나 말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아내가 웃을 때나 화낼 때 늘 콧잔등을 찌푸렸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콧잔등을 찌푸릴 때면 그는 아내에게 매번 패배했다. 콧잔등을 찌푸리는 아내를 보고 있으면 아내에게 이대로 계속 지기만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도 그랬어야 했다. 결혼기념일을 까먹은 그를 타박하던 아내가 기어코 콧잔등을 찌푸렸을 때 그는 아내에게 사과하고 아주 멋진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학술회만 끝나면. 그는 곧 아내와 멋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모르는 한기대 강사와 악수를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김정서’  


교수가 생각을 곱씹었다.


‘김정서, 30세. 제콤엑스 광팬. 콘서트에서 멤버 중 한 명과 악수했을 때 너무 기뻐서 펑펑 울었던 경력이 있음. 김치볶음밥을 좋아하고, 잘 만듦. 항상 분홍색 리본이 달려 있는 속옷을 입음.’


김정서가 청량리역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머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결혼을 하자는 이야기를 거절한 직후였다. 김정서는 소리를 지르다가 청량리역에 쭈그려 앉아 울기 시작했다. 기억속의 인물은 그 모습을 보고도 뒤를 돌아 김정서에게 멀어졌다. 김정서의 모습을 떠올리는데 슬픔이 몰려와서 교수는 조용히 손수건으로 눈을 닦았다. 그런데 왜 저런 여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거지?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조합했을 때 그 기억은 10년 전 쯤의 일이었다. 언젠가 저 학생과 교수 자신이 연애라도 했던 건가? 도무지 청량리역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신이 떠나버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교수가 결혼을 한지는 13년이 넘게 흘렀다. 내가 결혼 초에 나도 모르는 새 바람을 피운 것인가? 그러나 바람을 피웠다고 하기에 교수는 너무 바빴다.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지 가끔 자기 자신에게 경외심이 들 정도로. 무엇보다 교수 자신의 생애 동안 아내 외에 다른 여자에게 사랑에 빠졌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 맞는가?


교수는 김정서에 대한 생각을 곱씹으며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하는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교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김정서에 대한 생각이 한 차례 지나간 후에는 시간강사의 이름인 허경일이 머리에 맴돌았다. 허경일. 허경일. 허경일. 그 자와 악수를 한 이후에 김정서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 자가 무엇인가 잘못한 사람처럼 인파 속에 재빨리 숨은 후, 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어렴풋이 본 것 같았다. 그는 왜 그토록 빠르게 도망치듯 여기를 빠져나간 것인가. 마치 무엇인가 잘못한 사람인 것처럼. 그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그가 알고 있는 것인지 모두 무엇인지 불확실했지만 허경일이 김정서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교수의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이전 02화 02 게임 중독이 되어버린 시간강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