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의 스타벅스 캐나다 워홀 [18]
[18]
“안 갔으면 좋겠다, 꿈뀨야”
예상대로 시댁은 내 워홀행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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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뿐만 아니었다.
남편의 친구들도,
심지어 나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워홀을 간다고?
남편은? 남편은 한국에 두고?
나라면 워홀 못 보내…”
‘괜히 결혼했어….
결혼이 내 발목을 잡네..’
처음으로
결혼을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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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4세에
내 주변 사람들 중 첫 빠따로
청첩장을 돌리며 했던 말이 있다.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후회 없을거야.
근데, 일찍 결혼하는 것에 대한 후회는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남편과의 연애는 항상 행복했지만,
가족이란 사랑을 모르던 나는
혼자가 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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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계속되던 엄마의 폭력 이후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으로 남겨진 건
반지하 보증금 1000만원과 현금 80만원.
그리고 철딱서니 없는 중학생 여동생.
힘들게 살아온 이 삶에 애정은 없지만,
고된 삶이기에 행복 한 번 없이
인생을 보내버리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이겨내야 해. 버텨야 해.
한 뿐인 인생인데,
이렇게 계속 산다면 비참하다 못해
억울할 것 같아.’
내 삶을 바로 잡기 위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대학교 심리상담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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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상황 속에서
항상 감사하는게 있었다면
나라의 ‘기초생활수급’ 제도가
나를 지켜주었던 것이었다.
복지 덕에
대학교 등록금은 거의 내지 않고 다녔고,
대학교 내부 심리상담소는
재학생들에게는 무료였다.
졸업하기 직전까지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찢기고 매 맞던 마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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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폭력이 사라지자,
내 안의 힘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삶을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줄 아는 사람.
‘나는 이겨내.
나는 어떠한 역경에도 다시 일어나.
나는 내 안의 힘을 믿어.
이런 비참한 삶은
다시는 내 인생에 없어.
나는 매순간 빛나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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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했다.
기초생활수급자에서 벗어났다.
돈을 모았다.
월세집에서 전세집으로 옮겼다.
돈을 더 모았다.
가난한 나를 사랑해 준 사람과 결혼했다.
돈이 더 모였다.
전세집을 정리하고, 자가 신혼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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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내 힘으로 왔던 이 길..
내 힘을 내가 믿고 여기까지 끌어올린
고단하고 외로웠던 여정에 가족은 없었다.
오히려 가족이 있었던 시절은
나를 짓누르고, 불행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혼자인 순간에
가장 자유로웠고, 가장 신났다.
가족이란,
항상 나의 발목 잡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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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같이 살아야지..’
이 말을 듣고 숨이 턱 막혔다.
결혼을 안 했다면 이런 말도 안 들었을 거다.
피가 섞인 내 가족도 힘들었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법적으로 이어진 가족을 설득해야한다는 생각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시댁에 미운 털 박힐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워홀을 포기하면
평생 가족을 탓하며 후회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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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능성은 오직 내가 알아보고
내가 펼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것.
캐나다 워홀은
내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꼭 지금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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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꼭 가야해요,
지금 아니면 못가요.”
시댁을 설득하는
나의 발언이 시작됐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