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의 스타벅스 캐나다 워홀 [19]
[19]
“저는 쉴 새 없이 달려왔어요”
만 20세.
대학교 2학년.
부모 없음.
기초생활수급자.
먹여 살릴 중학생 여동생 있음.
겨우 스물이 된 나에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어야 했을까?
금수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처럼 그냥저냥 살 순 없었을까?
나는 왜 이런 부모를 만났을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받는 것도
내겐 사치인가?
짜증이 치솟고,
욕이 나오고,
울화가 치밀어 올라도
그 끝엔 언제나 나만이 있었다.
’아니야. 난 할 수 있어
결국에 나는 크게 성장할 거야.
원래 드라마 주인공들도 매번 위기를 겪는 법이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드라마 주인공처럼 살다 가야지.
내겐 힘이 있어‘
아무도 구원해 주지 않는 삶.
오직 나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삶.
나는 고단한 나의 삶에
평범함을 되찾아 주는데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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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남들이 말하는 평범함을 사는 것 같아요”
어느 날, 침대에 누워
내 일상을 돌아봤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운동한 뒤 씻고 바로 출근하고,
퇴근한 뒤, 신혼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남편과 얼굴을 맞대며 잠에 드는 이 일상…
더 이상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이제야 평범하게 사는 것 같다..
만 27세까지의 길은
평범함을 되찾는 여정이었다.
그렇다면 이젠…
“도전할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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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살았기에,
내려 둬야 할 것들이 참 많았어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그 속에서 내려둬야 할 것도 많았다.
교환학생 한 번 해보지 못한 건
가장 마음에 크게 남았다.
돈도 없고,
케어해야 할 중학생 여동생이 있기에
교환학생은 꿈만 꾸고 가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어려움 극복하며
이렇게 잘 살아남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또 얼마나 잘 살아남을지
나 자신의 한계가 궁금해졌다.
어려움 속에서 배운 것?
어떤 위기도 잘 극복할 거란
삶에 대한 자신감.
내 유한한 삶에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며
자신있게 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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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 목표 중에 하나가
타국에서 홀로서기 하는 거예요”
교환학생 못 가본 것은
한(恨)으로 남아
‘40대, 북미 1년 거주’가
내 인생 ‘목표’로 늘 적혀있었다.
꿈이 아닌 ‘목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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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손을 잡고
모교에 놀러 간 어느 날이었다.
학교 국제처에 놓인 ‘워킹홀리데이 안내서’를 봤다.
워홀?
대학생 때는 호주랑 캐나다 워홀 많이 가지.
워홀이 몇 살 까지더라..?
만 30세..?
(*현재는 만 35세로 변경됐습니다)
아~ 내 나이도 되는구나~
…어…?
나.. 가능.. 하네..?
북미 1년 거주 계획은 그리 멀지도 않았던 거다.
워홀..?
1년 거주 비자 나오지,
알바하면서 생활비 벌 수 있지..
“이건 기회야.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거야.
잘할 수 있어.
지금 가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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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들보다 빠르게 살아왔어요.
만 20살에 가장이 되고,
만 22살에 취업을 하고,
만 25살에 결혼을 하고..
그 속에서 많은 걸 이뤘지만,
많은 것들은 또 내려놨죠..
결혼도 한 제가 이제 갈 일은
사회적으로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아이를 키우며 그런 길이겠죠.
그러니 지금 가야 해야 해요.
아이가 없는 지금,
계속해 나이 먹는 게 익숙해지는 지금,
삶이 편안해진 지금,
모든 걸 다 가진 지금.
여유가 되지 못해서
도전할 수 없었던 그 도전을
지금 가장 젊은 이 순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도전할 수 있는 순간은
이 순간밖에 없을 거예요.
저는 지금 가야 해요.”
–
–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것.
그리고
기회를 잡아 주는 것은 늘 나 자신뿐이다.
나는 내게 그 기회를 잡아다 주기 위해
시댁을 설득할 내용을
머릿속에 하루 종일 그렸다
–
–
“둘이 괜찮다는데,
우리가 막아서 무엇 하겠나…”
미움받을까 걱정했던 순간들이 무색하게
시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흔쾌히 내 의견을 받아들여줬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가족 없이
혼자 캐나다 토론토에 자리 잡았다.
–
–
“어머니 아버지 잘 지내고 계세요?”
캐나다 워홀을 왔어도,
매주 시댁에 전화했다.
시부모님는 물론,
시할머니와 시고모에게도..
- 그럼 우리야 잘 지내지! 아픈 데는 없고?
“아유 그럼요! 끄떡없죠!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요?
- 우리 꿈뀨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니?
“할머니! 고모! 너무 잘 먹어서 살이 쪄서 큰일인걸요?”
- 우리 꿈뀨가 너무 보고 싶네
“저도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요
이제 반 왔어요. 곧 돌아갈게요.”
- 우리 꿈뀨, 할머니가 너무 사랑한다.
“저도요 할머니. 저도 할머니 사랑해요.”
우리 엄마도 나한테
보고싶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이걸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댁에서 듣고 있을 줄이야…
시댁의 사랑은
13시간의 시차도 막지 못했다.
–
–
- 꿈뀨야, 널 응원해
- 사랑한다, 우리 꿈뀨
- 보고 싶구나 우리 꿈뀨
가족이란 사랑을 몰랐던 나는,
한 남자를 만나 부부라는 연을 맺고,
그의 가족들을
내 가족으로 맞으며 배웠다.
–
–
아직도 기억에 남는
시어머니의 한마디가 있다.
“꿈뀨야, 널 응원해.”
우리 부모님한테서도
못 들어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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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이 가족들을 선사해 준
인생 가장 소중한 남자에게
매번 감사하다.
“자기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고마워.
그댄 언제나
내 자랑, 내 사랑, 내 사람이야.”
–
–
아, 하늘은 내게 부모는 주지 않았어도
남편은 주었구나.
가족의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이걸 알려고 내가 여기까지 버텨왔나 봐..
참..
감사하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