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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희 Oct 27. 2024

당신은 이미 길들여졌습니다

한국에 두고 온 마음

 한 달 반의 장기휴가를 내놓고 나는 중요한 것을 두고 나온 사람처럼 며칠은 회사 시스템을 들락거렸다. 담당자가 변경됐다는 메일까지 쫙 돌려놨는데도 말이다. 원래 회사는 나 없어도 잘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진짜 잘 돌아가니 알 수 없는 서운함과 헛헛함이 들었다. ‘너 없으면 안 돼’라고 해준 동료의 말이 휴가를 떠나고 나니 뒤늦게 고맙게 느껴졌다.


 막상 한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가장 걱정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내 화분이다. 식물을 키워본 사람은 안다. 사람이나 동물은 아프면 표정이나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티를 내는데, 식물은 참 꽤나 이것저것 잘 견뎌주다가도 '이만 죽을게'하고 갑자기 생명을 다할 때가 있다. '아프면 아프다고 울어나주지.' 안타까우니 그런 맘도 든 적 있다.


  올해 초 이사한 집이 허전해 작은 사이즈의 몬스테라와 이름 모를 식물을 들였다. 20대 땐 그렇게 많은 식물을 죽이더니, 나도 모르는 새 가드닝 능력을 하사 받았는지 분갈이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자랐다. 아이들이 키가 크면 벽에 등을 대고 서서 연필로 표시를 하는 것처럼 새로운 잎이 날 때 인증샷도 잊지 않고 남겨줬다. 줄기를 세워 내 어깨에 닿던 날엔 나란히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다. (그때까지 내 고등학교 동창들은 아무도 내가 식물을 키우는지 몰랐다.)


(왼) 화분을 구입한 첫 날의 모습 (오) 6개월 후, 화분을 바닥에 두고도 이파리가 어깨 높이에 닿던 날



 일본으로 한 달을 떠나려니 이 화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됐다. ‘식물 잘 키우는 동료 집에다 잠깐 맡길까? 흠, 너무한 부탁인가’ 갈팡질팡하다 결국 베란다에 두었다. 룸메에게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3분만 흘려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룸메와 아직 친해지지 않은 터라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아주 심플하게 부탁하고자 고안한 문장이다. 담백하게 부탁했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여행 중에도 나무가 많은 곳을 지나가거나 읽던 책에 식물 얘기만 나오면 나는 두고 온 화분이 생각났다.


도쿄의 그린들. 츠키지 시장 근처 터렛 커피 / 구마 겐고의 신축건물 포레스트 다이칸야마 / 널찍한 잔디밭이 매력인 신주쿠 교엔


‘베란다에 놔서 햇빛 양이 달라졌을 텐데 잎이 다 타버린 건 아닐까?'

'해가 많으니 물 주는 주기를 바꿔 말했어야 했나?'

'잎이 타거나 노랗게 변했으면 어떡하지?'

'이미 죽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들을 했다.

매일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식물을 키우지 않아 본 누군가는 ‘죽었으면 하나 다시 사, 얼마 안 하잖아’ 할지 모르지만, ‘어린 왕자’의 구절처럼 나는 이미 ‘길들여져서’ 다른 몬스테라가 아닌 ‘그’ 몬스테라 생각을 하는 것이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위한 홈캠도 설치하는 시대에 식물과는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올드 패션드로 다시 만날 그날까지 오매불망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름도 꼭 지어주겠노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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