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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테의커피하우스 Jun 01. 2023

공간이 주는 힘

나무사이로 - 내자동

나무사이로, 서울 종로구 사직로8길 21
키워드: 공간이 주는 힘, 한옥, 향미, 산미 좋은 원두



들어가는 말


나무사이로는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이 구애 없이 방문하는 곳이다. 커피 애호가, 동네 주민,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연인,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까지 손님들의 색채가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광화문 근처에 약속이 있을 때 밥을 먹고, 경복궁 근처를 산책하다가 한적한 동네로 차 한잔하러 가고 싶을 때 생각나는 곳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탓일까? 주말 오후 시간에 이곳을 방문하면 대체로 손님이 많다. 높은 확률로 만석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주말 오후 시간대에 들르면 자리를 잡지 못할까 봐 초조한 마음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호기롭게 지인들과 나무사이로에 방문했다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테이크아웃을 해서 나오거나 근처 있는 다른 카페를 갔던 적도 몇 번 있다. 대기 손님을 따로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빈자리가 없으면 헛헛한 마음을 감추고 가게를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은 종로구 안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카페다.


재작년 여름에 나는 나무사이로를 자주 드나들었다. 카페가 위치한 사직동에 1년 남짓 살았던 때의 일이다. 더운 여름 주말, 오전 시간에 이른 아침을 먹고 나와 나무사이로에 도착하면 오전 11시 정도였다. 토요일 오전 시간이면 유동 인구도 적고 아직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많지 않아 카페에도 손님이 적었다. 나는 이 시간대에 이곳에 오는 일을 좋아했다. 주문하는 음료는 당일 컨디션이나 날씨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체로 저렴한 가격대의 아이스 드립 커피를 마셨다. 때에 따라 너무 후텁지근하면 아이스 라테를 선택할 때도 있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손님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흠 그런 일도 있구나’ 생각하며 앉아 있거나, 책 한 권 가져와서 훌훌 읽다가 보면 마음이 자연스레 편안해졌다. 그렇게 주말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근처 교회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 어딘가 모르게 현실감을 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 소음과 내 안의 소음이 천천히 지워지는 듯한 감각이 퍼졌다.




산미가 좋은 원두


외관은 언뜻 보기에 새로 지은 건물처럼 보이지만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숨겨진 하나의 공간이 더 펼쳐진다. 입구에는 캐셔와 브루잉 스페이스가 보이고, 왼편에는 족히 종류만 10개가 넘는 원두들이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원두는 그 맛과 향이 다양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브루잉 스페이스 옆 공간 (2021년 사진)

또 원두를 찬찬히 살피며 시간을 들여 보고 있어도, 점원이 좀처럼 말을 걸거나 ‘필요하신 게 있나요?’ 하며 다가오는 일도 없다. 적극적인 접객 태도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방임에 가까운 이곳만의 제도에 아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반갑다. 진열대 옆에 적힌 커피 노트와 가격을 비교하며 ‘이번에는 적당히 이걸 사볼까?’ 하며 고민하는 시간은 마치 단잠과도 같아서 누군가 그 달콤함을 깨버리는 순간 눈앞이 아찔하다.


나는 이곳에서 원두를 자주 구매하는 편이다. 로스팅된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원두가 많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천천히 구경해도 좋다는 데 메리트가 있다. 하지만 200그램 한 봉지에 1만 원 대 후반부터 많게는 2-3만 원까지 나가는 원두를, 한 번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구매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곳의 원두는 향을 잘 구현해 낸다. 나에게 나무사이로를 한 마디로 정의해 보라는 미션이 주어진다면 ‘향미를 잘 구현해 내는 집’이라고 하고 싶다. 심지어 다크 로스팅된 진한 종류의 원두를 마셔봐도 테이스팅 노트에서 소개하고 있는 꽃 향기나 과일 향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는 다른 커피집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이곳만의 매력을 유지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이 주는 힘


다시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원두를 파는 공간 근처에는 간이로 만든 듯한 넓고 얇게 빠진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다. 두 사람 정도 앉으면 꽉 차는 비좁은 공간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자동문 바로 옆이라서 차분하게 커피를 즐기기 좋은 자리는 아니다. 자동문을 통과하면 이곳의 정수가 등장한다. 바로 작은 한옥이다.


한옥은 디귿자 모양으로 신축 건물과 맞붙어 있고 한옥 중앙에는 옛 가옥 형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작은 마당이 있다. 신축 카페인 줄 알고 들어온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마당 왼쪽에는 마구간을 연상하게 하는 작은 공간이 있다. 연상하게 할 뿐 실은 어떤 관련도 없다. (심지어 가축이 들어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지도 않다.) 이곳에는 넓게 빠진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해당 공간 옆에는 나무로 된 커다란 대문이 하나 있다. 대문에 달려 있는 커다란 띠장과 철재로 된 문고리는 예전에 이 집에 살았던 주인 내외와 손님들이 대문을 통해 드나드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지금은 굳게 닫혀 있지만 말이다.


야외 공간에서 마시는 커피

야외에는 약 서너 개의 테이블이 적당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커피 테이블과 벤치는 야외에 두는 것이라 철재나 방수칠 한 나무로 되어 있다. 그런 탓에 오래 앉아 있기에는 용이하지 않다. 다만 날이 궂지 않다면, 나무사이로의 야외 공간에 앉는 것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차를 한잔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마당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경험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한옥 카페 내부


한옥의 안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얕은 계단이 있다. 기단을 목재로 덧대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는 게 특징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커피를 제조하는 공간은 건물 앞쪽에 있고 마시는 공간은 뒤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커피 주문을 한 뒤에, 자리를 한차례 잡고 진동벨이 울리면 다시 커피를 받으러 나가야 하는 구조다.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한 것이 아닌 이상 진동벨이 울리면 앉아 있던 공간을 벗어나 음료를 받아와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심지어 브루잉 커피를 많이 주문하기 때문에 음료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하지만 이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들은 그 불편함마저 어쩐지 즐기고 있는 듯하다. 누구도 재촉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천천히 본인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다.


한옥의 내부로 들어가면 왼편에는 마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통창이 보인다. 이 창과 연결된 곳에 카운터 좌석이 있다. 이곳에 앉으면 야외 손님들을 엿보는 재미, 때때로 가게에 놀러 온 강아지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바로 뒤에 족히 6명은 앉을 수 있는 원탁이 하나 있다. 원탁의 기사들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대한 탁자다. 위아래로 잘 차려입고 턱을 괸 뒤, 누군가와 진지한 얘기를 나눠야 할 것만 같다. (현실은 손님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잠시 원탁을 점령하는 호사를 누리며 사진으로 남긴 게 전부다)


커다란 원탁을 홀로 쓰는 호사 (feat. 손님이 없는 날)


내부의 곳곳에는 2인석 테이블이 놓여 있다. 전부 다 합치면 약 20명 남짓을 수용할 수 있는 협소한 공간이다. 한옥의 가장 안쪽에는 좌식 공간이 하나 있다. 이곳은 다락방처럼 한 계단 더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다소 수고스러워 앉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신발까지 벗고 들어가야 해서 동행한 사람이 ‘저곳에 앉는 게 어떻겠느냐고’ 고집하지 않는 이상 좀처럼 가볼 일은 없을 것 같다.




메뉴 이야기


메뉴의 구성은 에스프레소 베리에이션, 브루잉, 잎차, 몇 가지 티 베리에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스프레소 음료도 브루잉 음료도 전부 훌륭하다. 무엇을 골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건 브루잉 음료다. 매장에서 파는 원두 중 4가지 정도를 핸드드립 메뉴로 올려놓는다. 보통 2가지는 당시에만 파는 시즈널 원두, 나머지 2가지는 나무사이로에서 꾸준히 판매하는 스테디셀러 원두를 고수한다. 브루잉 음료를 추천하는 이유는 원두가 지닌 특성에 맞춰서, 내리는 시간과 온도를 섬세하게 조절하여 향미를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바리스타들이 최적의 브루잉 시간과 온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내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다가 점원들끼리 원두 브루잉 방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맥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원두는 첫 번째 내린 것보다 두 번째 내렸을 때가 더 맛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어떤 원두는 브루잉한 직후보다 조금 식은 후에 마셨을 때 더 맛있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이날은 돌로레스(콜롬비아) 아이스 드립을 선택

그 얘기를 듣기 전까지 원두는 무조건 첫 번째 내렸을 때 가장 맛있고 신선하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커피마다 담고 있는 성질이 다르고 농도 역시 맛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처음 내린 원두가 무조건 그 향미를 잘 담아내는 것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두 번째 내리는 원두의 향미가 첫 번째 내린 원두보다 그 맛을 더 잘 구현해 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런 식으로 점원들끼리 커피와 관련된 스몰 토크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이곳의 사장은 아니지만) 저런 대화를 나누는 점원이라면 정말 마음속 깊이 아끼는 마음이 들 것만 같았다.






마무리하며


나무사이로에 대한 추억은 무더웠던 재작년 여름날, 이곳에서 한가로이 오후 시간을 보내던 기억들로 중첩되어 있다. 시원한 선풍기 바람을 등 쪽으로 맞으며 따분한 책을 읽던 그 시간 속의 내가 이 공간에 남아 있다. 그 해 나는 매우 피폐해져 있었고 공허해진 마음을 품어줄 '공간'이 필요했다. 나무사이로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조용한 위로를 건내 준 공간. 여름은 무더웠고 동시에 충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근처 슈퍼에서 탄산수 한 병을 사 언덕을 올랐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아서 무척 더웠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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