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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테의커피하우스 Dec 27. 2024

누구의 딸도 아닌 지혜

패들러커피 - 시부야

2-26-5 Nishihara Shibuya, Tokyo, Japan
키워드: 스텀프타운, LP 청음, 핫도그


들어가는 말



올해 여름과 겨울, 도쿄에 다녀왔다. 첫 번째 여행은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두 번째 여행은 혼자 떠났다. 두 번째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에 앉아 나는 결심했다. 이번 여행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쓰자고. 그 어떤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여행을 해보자고 말이다. 회사 메신저는 배지 알림을 꺼두었고 카카오톡도 방해 금지 모드로 전환했다. 이번 여행지에서는 그 누구의 부하이자 상사도, 자식이자 친구도 아니고 싶었다. '자아를 내려놓고 순수하게 즐기기'라는 목표는 명상하는 인간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말과 다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방인으로서 타지에 툭 하고 떨어진 이상 외부의 것들에 휩쓸리기 쉽기 때문이다. 자칫 의식하지 않으면 미간에 힘을 준 채로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일정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통하지 않는 언어와 문화 장벽으로 인해 난감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그렇기에 더욱, 수축된 동공에 힘을 풀고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일을 자제하며 최대한 노래를 듣지 않고 많이 걸어 다녔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려고 노력했더니 어느 정도는 명상하는 듯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뉴욕에서 도쿄까지


패들러 커피는 미국 스텀프 타운 원두를 사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번 방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텀프 타운은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로스터리다. 특히 스페셜티 커피를 제공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로스터리로 꼽힌다. 5년 전, 뉴욕 여행 중 묵었던 에이스 호텔 1층에 스텀프 타운 매장이 있었다. 당시에도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일 아침 외출하기 전, 서양인 틈바구니에 줄을 서서 커피를 주문해 고소한 라테를 사 먹었다. (아주 맛있었던 기억) 이번 도쿄 여행에서 방문한 패들러 커피에 스텀프타운 원두가 진열장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메뉴는 단출하다. 아메리카노, 라테, 프렌치 프레스로 내린 드립이 전부라서 고민의 여지가 없다. 여행 중 두 번을 방문했는데, 첫 번째 방문은 이른 아침이라 8시가 채 되기도 전이었고, 따뜻한 라테와 핫도그를 주문했다. 아침부터 핫도그를 주문하는 사람이 있냐고? (나 포함) 예상외로 있다. 이곳의 간판 메뉴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무겁지 않은 맛이라서 아침대용으로 먹어도 속 부대낌이 없다.


주문을 마치자 점원이 귀여운 핫도그 모양의 작은 마스코트 순번표를 주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면 가져다주겠다고 한다. '그런 시스템이군' 하며 자리에 앉아 주변을 슬렁슬렁 구경하고 있는데 음료가 먼저 나왔다. 미색 컵에 소박하게 담간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온몸의 세포가 찌릿하고 깨어나며 동공이 슬며시 확장되었다. 이런 커피라면 이 값을 주고 먼 동네까지 찾아와 시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오길 잘했다.



사랑방에 모이는 주민들


매장 안을 살펴보니 아침 8시가 채 되기 전인데 손님이 꽤 있다. 바 테이블에 앉아 작업을 하는 프리랜서도 보이고, 지인과 약속을 잡고 만난 외국인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도 있다. 관서 지방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 여행 중인 듯한 엄마와 아들도 있다. 다들 차분하고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눈치다. 타국에서 온 이방인은 이곳에 나밖에 없는 듯하다. 그 안에 슬며시 껴, 나 역시 이곳 주민인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다.


저 멀리 앉은 테이블에는 중국계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로 오가는 손님을 살핀다. 나 역시 라테를 홀짝거리며 그녀를 관찰한다. 훌륭한 커피 맛에 이따금 감탄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목덜미를 내다보았다. 중년 여성은 이 동네에 사는 주민인 듯하다. 그녀 주변으로 지인들이 하나둘 모였다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흩어져 떠났다.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는 주민이군', '나라도 이 동네에 살았다면 매일 아침 오고 싶겠어' 하는 생각을 하며 자문자답을 이어 나갔다.


+ 여기부터 핫도그 이야기 (궁금하지 않다면 스킵해 주시기를)


음료를 절반 정도 마셨을 즈음, 주문한 핫도그가 나왔다. 바게트 질감의 딱딱한 빵 안에 육류 함량이 높은 소시지(겉으로 보기에도 보급형 소시지와 다른 비주얼)와 사우어크라우트가 올려져 있다. 겉치장만 핫도그일 뿐,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구성과는 비주얼부터 다르다.


부드러운 빵이 아닌 딱딱한 빵을 사용한 점부터 '이게 뭐지?' 싶다. 좋게 말하면 차별성이 있다. 그리고 한 입을 베어 먹어보면 과연 그 인기의 비결을 알 수 있다. 통념을 비틀어 몇 가지 소재를 대체하는 것으로 이런 메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찌 보면 이런 핫도그야말로 천재성이 깃든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든든하게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이곳에 대한 모종의 신뢰가 더 깊어졌다.



미세한 진동의 파장


LP 청음을 기반으로 둔 로스터리 카페가 국내에도 많이 보급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전담으로 턴테이블을 관리하는 직원이 상주한다는 점이 유독 재밌다. 음료를 만드는 인원은 음료 제조에 집중하고, 턴테이블을 관리하는 직원은 테이블 서빙과 손님 응대 등을 담당하며 이따금 다 돌아간 LP를 정리하고 턴테이블에 새 LP판을 올린다. 직원을 상주시키고 청음이 끊기지 않도록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을 쓰고 있다니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패들러 커피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시간대가 오후  2-3시경이었는데 첫 방문 때와 달리 매장 내부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겨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메뉴판 가장 위에 있는  브루잉 커피가 궁금해서 점원에게 물어보니 프렌치 프레스를 사용해 제공한다길래 그 점도 독특해서 주문해 봤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을 정도로 향미가 뛰어나거나 밸런스가 좋다고 느끼지 못했다. 첫 번째 마셨던 라테의 여운과 충격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원두의 특성을 고려해 봤을 때 우유가 가미된 베리에이션 형태가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마무리하며


접근성이 좋은 편이 아니라 시부야 안에서도 다소 동떨어진 니시하라 동네 한가운데 있어서 가는 데까지 적당한 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음에 도쿄에 다시 간다면 이곳만큼은 꼭 다시 방문할 것 같다. 공간 자체가 매력적이고 안락해서 시간을 보내는 데 즐거움이 가산된다. 또한 커피와 음악에 대한 진심 어린 태도가 느껴져 나 역시 좋은 기운을 얻고 일상에 영감이 된다. 이런 공간에서 매일 좋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싶다. 문득 서두에서 언급한 중국계 단골손님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녀는 오늘도 아침 7시 30분이 갓 넘은 시간에 문가쪽 자리에 앉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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