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자 C Aug 19. 2024

상심한 이를 위한 깊은 위로의 노래

선우정아, <도망가자>

   뒷사람의 콧김이 목 뒷덜미에 닿아도 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할 때, 어렵게 도착한 회사에서 일과 사람에 치여 숨막힐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용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또는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입니다. "도망가자~" 하는 첫 소절만 들어도 딱딱하게 굳어 버린 마음이 조금 말랑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 노래를 얼핏 들었을 때에는 연인들이 반대나 장애를 피해 떠나는 사랑의 도피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 보니 상심한 이를 위한 깊은 위로의 노래였습니다.


아티스트: 선우정아

앨범: Serenade

발매: 2019.12.12.

장르: 알앤비/어반

작사: 선우정아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너의 맘이 편할 수 있는 곳 그게 어디든지 얘기 해줘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가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어디로든 어떻게든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그 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당연해 가자 손잡고 사랑해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이 노래의 화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보이는 '너'를 발견합니다. 그러고는 "도망가자"라고 제안하죠. "도망가라"가 아니라 "도망가자"입니다. 상심한 이에게 어디로든 떠나 보라는 느슨한 권유(勸誘)가 아니라 함께 떠나자는 청유(請誘)입니다. 자신도 그 여정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죠. '너'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상심한 이를 위해 어디로든 언제든 함께 떠나자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일상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누군가를 위해 그 역할과 일상에서 벗어나 함께 떠나자고 하는 이 화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곡은 노래만큼이나 뮤직비디오의 여운도 오래 남는 곡입니다. 뮤비의 주인공은 예상을 벗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비교적 젊은 주인공과 그의 연인 또는 친구가 등장할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 주인공은 중년을 지나 초로의 나이에 접어드는 어머니였습니다. 배우 서영화 씨가 이 역할을 맡았는데 이 뮤비를 보고 난 뒤 배우의 프로필을 찾아볼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였습니다.


https://youtu.be/GOS6C2jXTa8?si=lf-8x8EPB5rL2ecB


   전화벨과 세탁기의 종료음이 동시에 울리며 이 뮤비는 시작됩니다. 그 소리가 30초가 넘게 지속되도록 주인공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게 거실 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쯤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카메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삶의 의지를 상실한 듯한 주인공을 클로즈업으로 잡았다가 멀어지며 주인공을 둘러싼 공간 전체를 비춥니다. 살림살이가 널브러진 거실에 앉아 있는 주인공을 비추던 카메라는 다시 주인공의 손을 클로즈업 하는데, 저는 이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손짓만으로도 공허함과 슬픔을 표현해 낸 배우의 손 연기에 한 번 놀라고, 이를 기획하고 감각적으로 담아 낸 감독(Hobin)의 연출력에 두 번 놀랐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주인공은 때로 정신이 들어 세탁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앞을 서성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주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들을 해낼 의지도 기력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저 마지 못해 하고 있죠.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주인공의 이 기분을 알 것만 같습니다. 꿈 많던 아이는 사회인이 되고 가정을 이루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일하고 가족을 돌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쫓기듯 살다가 맞이한 중년, 일에서는 성취감을 느끼는 이들보다 패배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고, 인간 관계에서는 사랑이나 만족감보다 상실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전보다 쇠퇴하는 느낌이 드는 나이니까요. 주인공은 세탁실과 거실 주방을 서성이지만 영혼은 그곳에 없는 듯합니다. 노래가 끝날 무렵에야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자 주인공은 현실로 돌아와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냄비가 올려져 있는 가스레인지로 다가가 불을 켭니다.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떻든 삶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입니다. 선우정아의 노래처럼 어디로든 도망가야 하지 않을까요?


   주인공의 이 깊은 우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 사회』에서 이 시대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근대가 푸코가 정의한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복종적 주체였다면, 현대는 명령과 금지의 자리를 자유와 과잉 긍정이 차지한 성과사회이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주체는 성과주체입니다. 성과주체는 사회나 권력자의 지시에 복종하는 대신 긍정성의 과잉 속에서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자신을 마모시킵니다. 그 결과 번아웃 상태가 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자신을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오늘날의 사회는 무한한 자유와 긍정 속에서 자신을 소진시키는 사회이고, 이런 사회의 만성질환이 피로와 우울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피로와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넘쳐나는 자기개발서와 성공을 위한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비켜 서야 할까요? 아직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이 노래 가사와 같은 말을 해 주는 이가 곁에 있다면,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은 이가 있다면 삶이 견딜 만할 것 같습니다. 상심한 나를 위해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하는 사람, 나조차 나에 대한 자존감과 존재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 줄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규율사회든 성과사회든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화자는 '너'에게 재촉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깊은 상심이나 우울에 빠진 사람은 금방 괜찮아질 수 없습니다. 상심이나 우울이 무언가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상실을 애도하거나 그 빈자리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슬픔이나 우울에 빠진 사람을 오래 지켜봐 주지 않습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그러고 있냐,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하며 당사자보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힘들다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하죠. 그렇기에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하는 가사는 이 곡이 상심한 '너'를 얼마나 섬세하게 배려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너'의 "얼굴 위에 다시 빛이 스며들"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톺아보며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나요? 도망가자고 말해 주고 싶은 사람이, 말해 줄 것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나요? 그렇다면 꽤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잠시 상심했더라도, 우울하더라도 언젠가 얼굴 위에 다시 빛이 스며들 테니까요.



이전 08화 마음의 문을 열고 듣는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