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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맘혜랑 Sep 04. 2024

태우기라도 해야지

삼겹살이 구워온 행복

보이지 않는 먼지가 구석구석 쌓여있다. 업소용 커다란 청소기를 돌려도 털어내지 못하는 먼지가 있다.

여기저기 썩고 곪는 냄새가 나는데 선 듯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냥 방치할 따름이다. 특단의 조치 필요하다. 빡빡한 도심의 현실에서 채워지기만 하는 세상쓰레기들을 말없이 품어주는 고요한 숲으로 가기로 한다. 상처 치료는 마데카솔이라 했는데 할퀴고 찔리고 잘라진 가슴을 치료하기에는  자연보다 더 좋은 곳이 없는 듯하다


담양에 있는 지인의 농막을 갔다. 차가운 컨테이너 박스가 어느새 자연 속의 힐링 호텔로 변신해 있었다. 자칫 차갑고, 자칫 썰렁했을 농막이 주인의 넉넉한 온기로 가득 찼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그곳에서 하루를 벌겋게 태웠다. 갱년기가 오고부터 잘 풀리지 않는 사업도 매 순간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빈 둥지 증후군도,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과거의 열정으로 이루어 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도 그 모든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들을 모두 불태워버릴 수 있었다.


어릴 적, 엄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불꽃은 엄마가 짊어졌던 6남매의 땟거리를 태우는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그 불빛의 에너지로 온종일 이산 저산을 다니며 솔잎을 긁어모았고 또 장날이면 장에 나가 나물들을 팔아 쌀을 사 왔다. 시골장에 뻥튀기 아저씨를 볼 때마다 때를 썼던 내가 지금은 귀엽다 못해 밉다. 어쩜 그렇게 엄마 맘을 몰랐을까? 나도 지금 엄마다. 운영하던 매장을 접고 잠시 쉬니 즐거워야 하는데 왜 나는 지금 고단한가. 그 고단한 하루와 삶의 무게가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의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붙이며, 단순히 밥을 짓는 것 이상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의식을 치렀던 것이다. 불은 파괴와 창조의 양면성을 지닌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는 재가 남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시작이 움튼다. 마음속의 불안까지 모두 던져 넣고, 어쩌면 엄마는 아궁이의 불꽃을 통해 새로운 하루를 위한 희망을 태워내셨는지도 모른다. 그 곁에서 나는 불쏘시개로 아궁이를 쑤시며 덩달아 같이 오늘을 태웠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리고 지금도 태운다.


지난 주말, 나도 그 불을 지펴보았다. 짚불이 타오르며 쓸모없는 물건들과 함께 내 마음속 짐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사업자등록증도 영업신고증도 잡다하게 쌓인 거래명세표들도 이 구석 저 구석에 쌓여있던 그때의 시간들을 활활 태우며 정리하고 있다. 코로나가 망친 내 사업에 대한 미련도 같이 태워버린다. 집 안이 밝아진 것처럼, 내 마음도 환해졌다. 아궁이 불처럼 타오르는 짚불 속에서 내 스트레스도 함께 사라졌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다시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삶에서는 자주 불필요한 짐을 짊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 짐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 앞에 새로운 빛이 들어온다. 에피쿠로스는 "소소한 즐거움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라"라고 말했다. 짚불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행복은 거창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작은 순간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어제 사온 얼갈이 두 단과 열무 두 단으로 김치를 담갔다. 멸치액젓 적당량, 마늘 3스푼, 생강 1스푼, 쌀풀 2그릇(가락국수그릇), 절인 열무와 얼갈이, 약간은 MSG(맛소금)로 삶을 버무렸다. 벌건 양념장이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를 들뜨게 한다. 맛있다. 이미.


이 작은 순간들 속에서 숨겨진 행복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정갈하게 농막 사용법을 써 놓고 간 주인장의 섬세함이 삼겹살을 맛있게 구웠다. 자상한 주인장을 닮은 화로, 연기를 뿜어내는 굴둑도 주인장을 닮았다. 매캐하게 눈을 따갑게 하고 코를 따갑게 쑤셨을 연기가 굴둑으로 날아가며 내 스트레스를 홀라당 데려가버렸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짚불의 열기가 내 가슴속에 꾹 누르고 있던 화기를 덜어냈다. 한의원에서 기다란 바늘로 가슴을 한 방 뚫고 온 듯 시원하다. 길다린 침 한 방이 덜어낸 짐, 삶이 쫄깃쫄깃하고 고소하고 부드럽다. 무거운 것들을 다 태우고 나니, 새롭게 다가올 날들이 기다려진다. 나를 웃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것도 아닌 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내 내면에 커다란 풍파를 만들었다. 미움이 사라지고, 증오가 사라지고, 그리고 나를 아프게 한 세상도 사람도 모두 다 안쓰러움으로 다가온다. 하나 둘 모두 사그라든다. 이건 아마도 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는 세상 무에 그리 애 닳으냐고. 지금 이 순간도 순환하는 자연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고 있음이리라. 바깥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의 원재료는 속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지금 바깥으로 나오는 이 평온함은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사랑의 기운일 것이다. 시시때때로 이렇게 나에게 들어오는 고마운 기운들을 잘 살피고 잘 나누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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