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너라서 더 소중해!
베르트 모리조, <요람>, 1872.
한 여자가 요람 속 아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림 속 여자는 모리조의 언니 에드마이고 요람 속 아기는 모리조의 딸이다. 모리조는 여성 화가였다. 그녀는 풍경화보다는 가족의 모습을 주로 그렸는데, 언니가 자는 자신의 딸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순간을 포착하였다. 따뜻하고 포근한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장모님과 처제, 동서가 생각이 났다.
두 모녀와 동서는 다윤이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광팬이다. 집 근처에 사시는 장모님은 거의 매일 오신다. 그리고 다윤이의 모든 성장 과정을 지켜보시며, 미숙한 우리를 대신하여 돌봐주시기도 하신다. 사실상 다윤이의 ‘엄마’라 할 수 있다. 처제는 제법 먼 곳에 살면서도 시간이 되면 우리 집에 와서 다윤이와 함께 자려한다. 물론, 두 손은 무겁게 옷을 사 들고 온다. 다윤이를 바라보는 처제의 눈빛은 이모 이상이다. 나보다 더 하다. 새벽에 다윤이가 울어도 일어나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군말 없이 안고 재운다. 장모님과 처제의 모습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두 모녀는 왜 다윤이에게 이렇게 시간과 돈, 체력을 쏟으면서 돌보는 것일까?
그때 알았다. 사랑을 말이다. 사랑은 생각하는 마음이 머무는 순간이다. 그래서 사랑은 집중이다. 온전하게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 같은 공간에 없어도 생각나고 집중할 수 있는 것.
그런 면에서 장모님과 처제는 분명 다윤이를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 사랑이 분명하다.
옷 한 벌, 미소 한 번, 하룻밤의 돌봄. 이 모든 것에 다윤이를 사랑하는 시선이 담겨있다.
다윤이의 할머니와 이모, 엄마와 아빠의 사랑 덕분인지 다윤이의 신체에 변화가 생겼다. 조금씩 손가락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 그 손가락 끝에는 손톱도 자라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손에 힘을 꽉 쥐고 있어, 손가락을 잘 펴지 않았다. 내가 손가락을 펴주려고 해도, 손에 힘을 너무 줘서 울기만 할 뿐 펴지 않았다. 그런데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펴져 있는 것이다!
이제 할머니, 이모, 엄마, 아빠를 믿을 수 있어서 손가락을 펴는 것은 아닐까? 이전까지는 붙잡을 것 없어 불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조금씩 전달되면서 그녀가 마음을 열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다윤이의 손가락이 더 예뻐 보였다.
사는 것도 그런 것 같다. 무엇인가 믿지 못하고, 불안할 때면 이를 악문다. 그리고 독기만 남아 세상을 불신한다. 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이들이 있다면 마음속 빗장을 풀고, 그들의 손을 붙잡게 된다. 그리고 마음속 메아리를 공유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사랑과 믿음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에우제니오 에두아르도 참피기, <관심의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