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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슨트 춘쌤 Apr 26. 2022

다윤다움

#17. 너라서 더 소중해!

칼 라르손, <체크무늬 옷을 입은 폰투스>, 1890. 


 아내가 깨웠다. “여보, 다윤이 볼 시간이야.” 비몽사몽 한 얼굴로 화장실 거울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다크 서클, 충혈된 눈, 헌 입안을 보면서 초췌한 내 ‘민낯’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옷은 더 엉망이다. 다윤이의 이유식 밥풀이 굳어 딱딱해져 있었다.      

 반면 다윤이의 얼굴을 점점 이뻐지고 있다. 내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윤이와 함께 식당과 카페를 가면, 모두 인형처럼 예쁘다고 한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태어났을 때는 정말 남자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분홍색 옷을 입혀, 여자임을 보여줘야 할 정도였다. 칼 라르손이 그린 <체크무늬 옷을 입은 폰투스>와 정반대 상황이다. 칼 라르손의 세 번째 아이였던 폰투스는 성별이 남자이다. 처음에는 여자아이로 알았다. 분홍 옷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폰투스의 얼굴이 다윤이와 상당히 닮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얼굴의 어원은 '얼'을 담은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 얼굴은 그녀의 혼이 담긴 형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 얼굴이 보일 때 겁이 나기도 한다. 나의 부정적인 ‘민낯’을 닮을까 봐서다. 나는 소심하기도 하고 겁도 많다. 때론 우울증에 빠져 홀로 심각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급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이런 나의 ‘민낯’을 다윤이는 닮지 않았으면 한다.      

 칼 라르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수채화로 표현했다. 그래서 상당히 밝고 경쾌하다. 가족을 주제로 그렸기 때문에 행복감은 배가 된다. 하지만 칼 라르손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파산했으며, 동생은 죽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가, 이런 행복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반대로, 그는 자식들에게 불행한 어린 시절의 경험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아들 같았던 다윤이가 점점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듯이, 자신만의 민낯으로 얼굴을 만들어가면 좋겠다. 나의 복사본이 아닌,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 말이다. 살다 보면, 원본으로 태어나 복사본으로 살아가는 순간들이 많다. 흔히 말하는 Identity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도 하고, 나만의 생각이 없을 때 그렇다. Identity의 어원은 ego)를 뜻하는 ‘나’와 en-tity(실체)의 합성어라고 한다. 즉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정체성을 만든다. 그런 면에서 다윤이는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기보다 ‘이다윤다움’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매다 프리마베지의 초상>, 1912. 

 지금은 다윤이의 얼과 꼴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아빠로서 무엇을 해줘야 할지 많이 알지 못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그녀와 함께 누리고 싶다. 내 생각과 가치를 주입하기보다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고 느끼게 하고 싶다. 다윤이가 컸을 때, 아빠와 함께한 순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길 바라본다. 클림트가 그린 <매다 프리마베지의 초상> 속 매다처럼, 당당하게 살아가길 응원해 본다. 내일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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