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 약

#6. 소소한 시선이 닿는 순간

by 도슨트 춘쌤

말... 말... 말.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반복한다. 영혼이 없음을 느낄 때가 있다. 혼이 나갔다는 말은 이때 쓰는 것이다. 점심시간도 마찬가지, 영혼 없이 밥을 먹는다. 무엇을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육아를 한다.

달력을 봤다. 한 달의 중간.

아직도 15일이나 남았다.

요일로 따지면 화요일 같은 기분.

현재의 상태를 딱 보여주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내 책상 위 치약. 1년간 사용한 치약의 상태는 매우 뒤틀려 있었다.

내 상태처럼.

얼마 안 남은 치약을 짜기 위해 내가 힘을 준 것처럼

나도, 얼마 안 남은 에너지를 쏟아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쓰고 있다.

치약아! 너는 나는구나!

치약을 안쓰럽게 만지다, 다 짠 치약처럼 인생을 살았던 수잔 발라동이 생각났다.


그녀는 인상주의 화풍이 유행하던 19세기 후반, 몽마르트의 대표적인 모델이자 뮤즈였다. ‘행복의 화가’ 르누아르는 수잔 발라동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그림이 <부자발의 무도회>이다.

2022-02-05 20;26;26.PNG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부자발 무도회>, 1883,


그림 속 그녀는 행복해 보인다. 르누아르의 표현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지근거리에서 마음을 나눴던, 로트레크는 그녀를 다르게 봤다. <숙취>처럼.

로트레크, 숙취.jpeg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숙취>, 1887-1888.


그림 속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녀의 삶은 <숙취> 속 모습과 닮아있다. 사생아의 딸로 태어나, 자신도 18세의 어린 나리에 사생을 낳은 여인. 서커스를 타다, 부상일 입어 직장을 잃어버린 실직녀. 르누아르는 그녀를 자신의 그림에 맞게 바꿔 그렸지만, 로트레크는 그녀의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방전된 수잔 발라동. 그녀도 또한 19세기 또 다른 다 짠 치약처럼 보였다.


그녀는 왜 술을 취할 정도로 마셨을까? 무엇이 그녀의 삶을 힘들게 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던 나의 생각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깰 수밖에 없었다. 몽상에서 깬 나는 ‘숙취’에서 시달리듯, 현실의 피곤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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