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에서 하는 다이빙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스프링보드 위에 서서 그 탄성을 이용해 위로 도약한 뒤 아래로 떨어지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3m, 5m, 7.5m, 그리고 보통 최대 높이인 10m의 콘크리트 플랫폼 끝에 서서 중력에 몸을 맡겨 낙하하는 방식이다.
두 가지 모두 일상적인 몸짓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지닌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있는 대신 어떤 이에게는 완벽성의 추구가, 또 어떤 이에게는 단지 즐거움이 목표이다. 다이빙의 동작은 찰나의 순간에 끝나고야 만다. 그렇기에 다이버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공간 속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사차원적 조건을 절실하게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일까 그는 종종 자신의 몸짓이 타인의 시선이나 카메라의 프레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느낀다.
사차원성에 대한 의식이라는 말은 달리 하면 다이빙의 몸짓이 깨어 있음의 행위라는 뜻이다. 일상의 움직임에서는, 가령 방 문을 열고 나가 부엌으로 향할 때 걷는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눈이 인지하는 경로를 따라 다리는 저절로 움직이고 몸은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대부분의 움직임은 이처럼 알아차림 없이 이뤄진다. 그래서 종종 부엌에서 홍차를 우린 뒤, 컵을 들고 돌아와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휴대폰을 어디에 뒀더라?” 하고 당황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런 움직임은 어쩌면 단순한 습관이라기보다, 우리 몸에서 심장이 저절로 뛰고 피가 흐르듯 깊이 새겨진 생존의 패턴이자 본능적 프로그래밍 같은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다이빙의 몸짓은 그와는 다르다. 여기서 ‘이동’은 관성적인 무의식의 몸짓이 아니다. 플랫폼에서 물까지의 공간은 하나의 무대이고, 그 안에서 몸은 한 편의 글이나 음악이며, 낙하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이동하는 공간은 회화이자 무대가 된다. 몸짓 하나하나는 점점 완성되어 가는 벽화 규모의 회화를 위한 붓질이다. 의식은 언제나 몸과 같이 있다.
나는 3m 플랫폼 끝에 서서 물을 향해 선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동시에 두 팔을 위로 뻗어 도약한다. 몸은 허공에서 일직선으로 높이 솟구치고, 팔은 날개처럼 양옆으로 퍼진다. 곧 허리를 빠르게 접으며 상체가 자연스레 물 쪽을 향한다. 하강하는 동안 펼쳐져 있던 두 팔은 하나로 모아지고, 두 손은 맞잡은 채 정수리 위로 뻗는다. 이때 시선은 손끝과 물에 고정된다. 손이 물을 가르는 순간, 발끝까지 온몸은 팽팽한 긴장의 수직선을 그린다. 물보라는 거의 일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은 단 1초 남짓, 그 짧은 순간 동안 몸과 마음은 완벽히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이다
플랫폼에서 머뭇거리는 시간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내 몸짓은 마치 빌럼 드 쿠닝의 그림 같다. 그 혼란스러움, 주저함, 답답함,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은 마치 감정이 격해진 화가가 붓을 들고 캔버스를 거칠게 휘두르는 몸짓과 닮아 있다. 늘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몸짓을 드 쿠닝의 그림에 비유한다는 건 지나치게 나를 미화하는 일이니까. 이 노랗고 하얀 그림은 마구잡이로 거칠게 보이지만, 실은 붓질 하나하나에 의지와 결단이 서려 있다. 그건 너무나도 아름답기만 하다.
드 쿠닝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굳이 그의 그림에 나를 빗대야 한다면, 차라리 <여인들> 연작의 검고 혼란스러운 붓자국이 내 감정과 몸짓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나는 거의 1년 가까이 이 프런트 다이브 파이크(Front Dive Pike) 동작을 연습해 왔다. 처음엔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시작해, 3m 플랫폼과 1m 스프링보드를 오갔다. 몇 달 동안 수영장 끝에서 수없이 물에 빠지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3m 플랫폼에 올랐을 때는, 머릿속이 갑자기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 생각이 미래로, 걱정과 두려움으로 향하면 어김없이 주저하게 되고, 결국 실패한다.
물론 몸짓만이 문제는 아니다. 나는 매번 낙하하는 1초의 순간 동안 손을 맞잡고 그것이 물을 가르는 장면을 보겠노라 다짐하지만, 정작 단 한 번도 물을 본 기억이 없다. 그 1초 동안 정신을 잃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을 차리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완전한 깨어 있음이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면서 그래서 더 간절한 것이다.
반면 오랜 시간 훈련한 Y의 몸짓은 이렇다. 계단을 오르고 돌아 7.5m 플랫폼의 가장자리에 선다. 다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다. 팔을 위로 아래로 움직이며 긴장을 푼다. 이제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고 그것을 아래로 던진다. 상체를 밑으로 숙이고 콘크리트로 된 플랫폼 끝에 어깨너비 간격으로 두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손가락을 활짝 펴고 손바닥으로 단단한 기초를 만든다. 곧 깊이 숨을 들이쉬고 두 다리를 위로 힘차게 차올리며 팔을 곧게 펴 물구나무를 선다. 거꾸로 선 몸은 물을 등지고 정지한다. 온몸의 근육이 날카롭게 긴장한다. 손끝, 팔, 어깨, 복부, 허벅지, 발끝. 단단히 조여진 근육들이 마치 줄타기하듯 균형을 만든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정적 속에서 평형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호흡과 극도로 수축된 근육의 힘이다. 물로 도약하기 직전 다시 한번 그는 공기를 크게 들어마시고 마침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낙하한다.
연극의 클라이맥스 이후가 그러하듯 이제 이야기가 가파르게 해소로 치닫는 동안 독수리가 먹이를 향해 질주하며 떨어지는 듯한 역동적인 몸짓이 연속된다. 위를 향해 있던 다리는 아래로 떨어지고, 상체는 반대로 위쪽으로 올라온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싼다. 다시 상체가 앞으로 기울며 반바퀴 회전한다. 머리는 마침내 물을 향하고 정수리 위로 맞잡아 뻗은 두 손이 물을 뚫으려는 찰나, 몸이 물과 수직이 되고 그는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살짝 이는 물보라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7.5m의 공중에 있었던 그를 축하하는 박수가 된다. 일렁이는 물속, 반사된 빛 사이로 모호하던 형체가 점점 선명지며 Y는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중력에 모든 걸 내맡기면서도 그에 반하는 움직임,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는 순간, 추락과 상승의 몸짓은 역시 또 다른 드 쿠닝의 그림처럼 애타도록 아찔하고 이토록 우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