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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가 올 때는 새 수영복을

by 발걸음

6월 한 달 내내 수영장은 숨을 꾹 참은 듯 조용했다.
다이빙은 물론, 수영과 아쿠아로빅 강습까지 모조리 멈췄다.


가끔 유리창 넘어로 불 꺼진 거대한 실내와 바닥까지 훤히 드러난 풀장이 보일 때면 나는 한참을 멈춰 서서 물끄러미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물 대신 고요가 가라앉은 그 공간은 마치 꿈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설고도 이상한 장소 같았다.


서울에서 공짜 지하철을 타고 오던 할머니들, 평일이고 주말이고 하루도 빠지지 않던 열혈 다이버들,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을 하고 수영장을 돌던 강습반 사람들, 똑같은 수모를 쓰고 물속에서 춤을 추던 통통한 아쿠아로빅 할머니들, 풀 안을 천천히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던 노년의 남녀들.

홀딱 벗은 채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몸으로 만나서 웃고, 툴툴대고, 때로는 구경하는 시선 앞에서 연기자가 되곤 하던 사람들. 그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엔 그만큼의 빈 공간이 휑하게 남아 있었다.


드디어 7월 1일 수요일.

수영장에 다시 불이 켜졌다. 텅 비었던 풀에는 드디어 물이 가득 차 찰랑였다. 탈의실 문을 열자마자 이름은 모르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내 눈은 마치 안면 안식 카메라처럼 사람들의 얼굴을 흩고 지나갔다. 아침 샤워실은 다시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예전엔 그게 불편하기도 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 소란이 우리 모두가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곧 익숙한 까무잡잡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고, 우린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꼭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리움은 포옹의 강도와 길이로 전해진다.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우리 모두에게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이야기는 자제하지 못하겠다는 듯 터져 나왔다. 훈련 매트 위에서 몸을 푸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 머리 위로 말풍선이 톡톡 터진다.


“저, 그 사이 포항 집에 세 번이나 다녀왔잖아요!”
K가 말했다.
“이장님이 농사 도와주신다 할 때 냉큼. 갔다가 집에 오면 다시 천식이 도져서 힘들지만, 그만큼 그곳 공기가 좋다는 뜻인 것 같아요. 또 여기에 몸이 적응하느라 그렇고요.”
곧 포항으로 이사 갈 예정인 그녀는 눈가에 흙냄새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옆에서 J가 자신의 발목을 쓱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했다.
“달리기 하다가 접질렸어요. 인대 세 개 중에 하나가 끊어졌대요. 깁스는 며칠 전에 풀었고요.”
말은 가볍게 흘러나왔지만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그가 한 달을 꼼짝 못 하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얼마나 근질거렸을까 싶었다.


풀장 앞 샤워기 밑에서 마주친 M이 물었다.
“아이는 오늘 왜 안 왔대요?”

“또 다쳤어요. 낫는다 싶으면 또 넘어지고, 부딪히고, 접질리고… 끝이 없어요.”
그러곤 나는 자연스레 안부를 물었다.
“근데 오늘 얼굴빛이 참 좋으세요.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좋았다 나빴다 해요. 뭐, 늘 그런 거죠.”


M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 동글동글한 얼굴, 언제나 선한 미소를 띤 채 그 자리에 있다. 지난번 그의 투병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나는 문득문득 M이 잘 계실까 궁금했고 따뜻한 빵을 한 덩어리 구워서 드리고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호밀:우리밀 1:1 건포도 호두 사워도우가 어떨까. 요즘은 그것만 구워 먹는다.

“밀가루든 뭐든, 못 먹는 거 없어요. 뭐든 잘 먹어야 버티죠.”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담담한 마음이 느껴졌다.

생과 사, 소란과 고요, 움직임과 멈춤 사이를 오가는 이 수영장에서 우리는 오늘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한편 나는 오늘 좀 달랐다. 아마도 그건 다 새 수영복 때문이다.
늘 똑같은 개성 없는 수영복만 입던 내가 색다른 걸 걸치자 눈치 빠른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건넸다.

“언니, 와—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진짜 잘 어울려요!”
“화사하다, 예쁘다! 기분까지 밝아 보여요.”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오는 말들.


그러던 중 W가 슬며시 다가왔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 얘기나 던지는, 그 특유의 쾌활한 말투로 말했다.

“어딘가 다르다 했더니, 수영복 때문이었네요! 진짜 잘 어울려요. 왜 진작 이런 거 안 입었어요? 그동안 좀 칙칙했잖아.”
그 장난스러운 칭찬에 나는 웃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서 말이다.

그리고 잠시 뒤, 5m 플랫폼 위에서 다시 마주친 W가 또 한마디 던졌다.

“권태기 올 땐 장비로 달래야 해요. 요즘 다시 불타오르시려나 봐요? 수영복 바뀐 거 보니까. 저도 그동안 많이 샀습니다.”

“아, 그래요? 근데 왜 W 씨는 맨날 똑같은 빨간 빤스만…?”

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빨간색 수영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W는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 그게요. 같은 빨강이라도 미세하게 다 다르거든요. 톤이랑 재질, 무늬가… 그러니까 비슷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동시에 터진 우리의 폭소는 지상 5m 위의 공기를 한참 동안이나 간지럽혔다.


중년의 위기가 오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장기 할부로 빨간 스포츠카를 지르고, 그걸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해방감을 느낀다.
그런데 다이빙 수강생들에게 위기가 오면?
손바닥만 한 수영복 한 장이면 족하다.
그걸로 새 마음을 장착하고 다시 물속으로 뛰어드는 거다.


빨간 스포츠카를 몰던 영화 주인공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 고백을 할 때 고급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고, 현악 사중주단을 부르고, 디저트 안에 티파니에서 산 반지를 숨겨 놓는다.

여자는 커다란 알이 박힌 반지를 발견하고 황홀경에 빠진다.

이렇게 사랑은 늘 연출되는 과시적인 거다. 모든건 돈과 규모가 결정한다.
그러다 우리는 어느샌가 그런 이미지를 ‘진짜 사랑’이고 그런 남자를 최고로 멋진 남자라 믿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너무나도 자주 그 화려한 이미지와 현실에서 오는 차이 때문에 실망하고 만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렇게 과시적이지 않다.
진짜 사랑은 어쩌면 두 사람 만의 것이고 그렇기에 소박하고 조용하다.
그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고, 서로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에 있다.

물론 포옹과 서로를 쓰다듬는 손에도 있다.
물론 부자라면 커다란 큰 보석이 박힌 반지에도 사랑을 담는 게 자연스러울 테다.


그리고 여기에 그런 다정한 시선들이 있다.
서로의 변화를 감지하는 관심 어린 시선.
작지만 반짝이는 관심이 이곳의 온도를 천천히 달군다.

다이빙 레슨이 끝난 뒤 K의 물기 머금은 얼굴 위로 햇살이 비쳤다.

“아, 진짜 재미있었다!”

“맞아. 오랜만에 물에 빠질 때, 정말 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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