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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by 발걸음 Mar 07. 2025

그해에는 좀 다를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5월쯤 되었을 때는 안마당의 닭장 가는 길목을 지키는 스무 살 훌쩍 넘은 목련 나무 밑에서 파슬리와 고수, 딜이 약 5~10cm가량 높이로 자라고 있었고 북동쪽 담벼락 아래의 화단에는 펜넬과 오레가노, 타이 바질이, 대문 안쪽에 있는 중앙 화단에는 세이지와 캐머마일이 부지런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바질은 커다란 화분 두 개와 바닥 벽돌을 빼내어 드러난 얕은 모래흙 위에서 옹기종기 살림을 차렸다. 그것들은 한여름이 오기 전이라 아직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따먹고 두 주 정도 기다리면 다시 수확할 정도로는 크고 있었다.


날이 포근해지기 시작한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허브가 한창 기지개를 켜고 있는  정원에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같이 피자를 구워 먹곤 했다. 친구들이, 곧 친구가 될 사람들이 도착해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나면 나는 먼저 피자 오븐을 예열하기 위해 가스를 켠 후 그들의 손에 가위와 바구니를 들려주고 이어 자연스럽게 허브를 소개하는 일로 그날의 일정을 개시했다. 


시원한 수박을 갈아 온 배려심 많은 민아 씨가 할 만한 일거리 찾아 우리는 목련나무 밑으로 향했다. 나무 밑의 가로 세로 80cm 정도에 불과한 화단에는 아직 여리디 여린 잎을 나풀거리는 딜과 파슬리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깃털 같은 잎사귀를 하나 따서 손에 문질러 으깨 향이 배어 나오게 한 다음 민아 씨의 코끝에 가져다 대었다. “향기 맡아볼래요?” 그러자 그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커다래진 눈망울과 빛나는 미소로 가득 차고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미영 언니가 왔을 때는 시커멓고 고소한 호박씨 기름을 넣은 콩 샐러드에 정원에서 갓 수확한 타이 바질을 한 움큼 찢어 넣었다. 샐러드를 한 술 수북이 떠 넣어 우물우물 씹으며 우린 허브가 보석 같은 각양각색의 콩 잔치를 얼마나 신비롭게 드높였는지에 대해 깊은 찬사의 눈빛을 교환했다. 


종종 식물의 이름을 모르거나 아예 향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은 기회가 되곤 했다. 그건 내가 이 멋진 식물에 대해 제대로 소개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목사의 딸로 신심 깊은 개신교도로 성장하여 성경에 대해서라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정도로 할 말이 많지만 허브에 관해서라면 그렇지 않았던 미소 언니가 그랬다. 향신료가 되는 식물에 대해 나눈다는 건 언니가 나 같은 신앙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느님에 대해 얘기할 기회를 포착하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이다. 그건 그간의 관심과 보살핌, 땅이 일으키는 기적, 이 자연의 혜택을 받았던 저녁 시간과 그때 있었던 유쾌한 사람들까지도 공유한다는 뜻이니까. 



브런치 글 이미지 1


한편 가느다란 솜털 같은 모양의 잎과 팽팽 도는 프로펠러를 닮은 노란 꽃이 열리는 펜넬은 그해 봄에 씨를 파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겨울 동안 흙 안에 웅크리고 있던 뿌리에서 기적적으로 새순이 올라와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5월이 되었을 때는 옆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오레가노와 대비를 이루어 키가 이미 내 가슴 높이 만했고 곧 노랗고 작은 꽃망울을 방사형으로 터트렸다. 방문객들도 기특함을 눈치챘는지 높이 솟은 생소한 모양의 식물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 내 마음엔 자부심과 뒤섞인 기쁨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그들의 관심이 떠나기 전에 어서 이토록 개성 있는 식물의 매력과 쓰임새에 대해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나곤 했다. 나는 알았다. 누구든 마침내 그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 색채 가득한 향기에 자석처럼 끌리고 만다는 사실을. 


향을 내 식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건축가나 패션 디자이너 같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직접 시도하거나 프로토타입을 만들기 전에 이미 전문가들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떠오른다. 그들이 비상한 재주를 부리듯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충분히 상상력을 이용해 마음으로 향을 맡고 맛을 보는 게 가능하다. 카레에, 샐러드에, 물에, 그리고 빵 반죽에 넣어 구워져 나오는 순간을 그린다. 서로 조합하고 다른 재료와도 짝을 맞추며 상상의 혀로 그걸 맛본다.


길지 않은 허브 투어가 끝나면 사람들은 피자의 토핑과 샐러드에 넣을 거리, 또 차가운 얼음물에 넣어 향을 우릴 것들을 채취하기 위해 짧은 발걸음을 떼곤 했다. 보고 뜯고 향을 맡고 썰고 뿌리는 작업을 하는 동안 입에도 한 움큼 넣어 맛본다. 모두 피자 전문가가 된 기분이 든다. 한두 번 해보고 나면 빵 반죽을 공중에 들어 올려 납작하게 잡아당기는 일은 익숙하다. 곧 반죽 가장자리가 조금 타는 듯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부풀고 그 위로 치즈가 지글지글 끓으며 갈색으로 변한다. 우리는 그 신비로운 변신을 지켜보며 이탈리아 나폴리가 피자로 유명한 고장이었던가? 그곳이 어디든 간에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곧 오븐에서 피자를 꺼내 초록색 허브를 그 위에 흩뿌린다. 허브를 뿌리는 제스처는 소박하지만 순간을 드높이는 힘이 있다. 마지막 손길. 피자를 마무리하는 신비로운 향기. 


아직은 모기가 기승을 부리기 전의 초여름 밤하늘 아래서, 곧 지긋지긋한 무더위로 대체될 찰나의 바스락거리는 밤공기를 만끽하며, 조명 아래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드로잉 같은 그림자를 담벼락에 드리운 인동덩굴을 병풍 삼아, 사워도우로 구운 피자를 입에 베어 물고 와인을 마시며, 우리의 웃음소리를 멀리멀리 저 별들에게까지 날려 버리는 동안 나의 작은 정원은 이렇게 몇 번의 밤, 과묵한 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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